사적 제8호인 사천왕사는 통일신라 초기 문무왕 19년(679)에 창건된 사찰로서 신문왕 2년(682년)에 창건된 감은사와 함께 당시의 건축과 미술은 물론이고, 불교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천왕사지는 오랜 기간 잡초로 덮여 있었는데 현재는 여기저기 발굴조사로 맨 땅이 드러나 있다. 절터 남쪽 입구에는 2.4m 높이의 당간지주가 있고 그 앞 남동쪽에 비신과 머리가 잘린 귀부 2기가 드러나 있었다. 1906년부터 1984년까지 11차례에 걸쳐 이 절터에 대한 조사 및 단편적인 발굴이 있었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년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였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 결과 사찰의 규모는 남북의 길이가 105m, 동서로는 73m임이 확인되었다. 서천왕사지 중앙에 위치한 금당지는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기단이다. 상층기단의 지대석 외곽으로 원형의 하층기단 초석을 배치하였으며, 그 주위에 문양전을 깔고 장대석을 둘렀다.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전면 2개소, 후면 2개소, 좌우 1개소씩 배치되어 있다. 전면계단은 좌우 양끝에 있고, 후면계단은 그보다 1칸씩 안쪽에 배치되어 있어 비대칭을 이룬다. 금당의 중심부에는 방형(方形)의 대석이 있는데, 그 양옆으로 원형대석(圓形臺石)과 이형대석(異形臺石)이 놓여 있다. 방형대석은 본존불의 지대석(地臺石), 양쪽의 것은 협시불의 지대석으로 추정된다. 지대석 전방 좌우에는 지름 20㎝ 내외의 기둥 구멍이 있는 초석이 확인되었다. 금당지 앞에는 사방 3칸의 동탑과 서탑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탑은 신라 목탑으로는 최초의 쌍탑이다. 발굴 결과 목탑의 기단 벽면을 장식했던 소조 신장 전돌이 발견되었다. 표면에 녹색의 안료가 입혀져 있었다는 의미에서 ‘녹유신장벽전’이라고 한다. 이 벽전은 목탑 기단부 네면 가운데에 만들어진 계단을 중심으로 양쪽에 3매씩 한 면에 6매로 총 24매, 동서 양탑인 관계로 모두 48매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과정에서 모두 벽에 부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이 녹유전 일부를 복원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을 한 적이 있다. 금당지 북쪽에는 동쪽, 서쪽에 사방 3칸의 작은 방형의 건물지가 있다. 초석 중앙부에 지름 22㎝, 깊이 23㎝인 원공이 있고 이 주변에는 약 55㎝ 크기의 방형을 이중으로 모각하였다. 처음에는 이 건물지를 불경을 보관하던 좌경루(左經樓)와 우경루(右經樓)로 보았으나 이후 일부에서는 단석지라 하여 불교의식 공간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그 뒤쪽에는 강당지와 건물지가 있고 좌우에는 회랑지가 있다. 강당지 일부분은 동해남부선 철로로 훼손된 상태이다. 앞으로 철로가 이설된 후 발굴조사를 하게 되면 강당 부분도 전모가 밝혀질 것이다. 돌보는 이 없어 폐허로 남은 사지에는 북서풍이 모질게 불어 흙먼지를 날린다. 나라 밖으로는 북한 핵문제, 사드 문제로 인한 중국의 횡포가 도를 넘고 있다. 일본과도 사이가 틀어지고 있다. 나라 안에서는 각종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사천왕사를 복원하기까지는 요원하니 우선 또다시 채색비단으로 금당을 짓고 짚으로라도 오방신장을 만들어 고승을 모시고 문두루비법이라도 행해야 할 것 같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