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오는 삼기팔괴(三奇八怪) 가운데 금장낙안(金藏落雁)의 명성처럼 서천이 흐르는 금장의 수려한 공간에 경주시는 2012년 발굴작업을 통해 금장대(金藏臺)를 복원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경상도·경주부 누정(樓亭)에 의하면 ‘금장대는 서천(西川)의 언덕에 있다’기록되었지만, 금장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사리공양석상(舍利供養石像)이 발견되면서 신라 때 절터로 추정할 따름이다. 문화재해설판을 보면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읍성을 수복하기 위한 정찰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동해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었다’며 형산강의 수려한 굽이에 우뚝한 금장대를 임진왜란 격전 속 중요한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1553~1634)의 「금장대에 올라[登金藏臺]」시를 보면, 時冬至前一日 釜山賊新退 동지 하루전날 부산의 적들이 처음으로 물러났다 千古興王地 (천고흥왕지) 천년의 번성했던 왕도의 땅 群山鳳舞來 (군산봉무래) 여러 산에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네 明朝日南至 (명조일남지) 내일 아침엔 해가 남쪽에 이르고 昨夜賊東回 (작야적동회) 지난밤엔 적이 동쪽으로 물러갔네 風月詩仙去 (풍월시선거) 음풍농월의 시선은 떠나가고 關河玉笛哀 (관하옥적애) 변방의 옥피리 소리 슬프도다 平生感舊意 (평생감구의) 평생 옛 뜻에 마음이 움직여 一嘯强登臺 (일소강등대) 휘파람 불며 금장대에 오르네 『五峰集』卷3,「詩.登金藏臺」 임진왜란 때 장수 이호민은 부하들과 금장대에 올라 부산 승전보의 기쁨을 이렇듯 시로 승화시켰다.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1559~1617)은 그의 시에 차운하기를, 朔風吹酒盡 (삭풍취주진) 삭풍은 불고 술도 다하고 殘興挽人來 (잔흥만인래) 흥망은 사람에게 달렸다네 城郭今猶在 (성곽금유재) 성곽은 지금도 여전하건만 繁華去不回 (번화거불회) 번화함은 떠나가 돌아오지 않네 斷蓬千里影 (단봉천리영) 정처 없는 천리의 자취는 長笛一聲哀 (장적일성애) 긴 피리소리에 애달프네 吉語連朝至 (길어연조지) 승전보 잇달아 조정에 날아드니 塵淸利見臺 (진청이견대) 이견대에도 맑게 먼지가 걷히네 예전의 성대하고 번성함은 온데간데 없고 성곽만이 남아 쓸쓸함을 자아내고, 잇따른 승전보에 옛 신라의 땅에도 평온이 찾아든다. 이처럼 금장대는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에 놓여있었다. 무술년(1598) 겨울. 이공[이호민]이 진어사(陳御史) 접반(接伴)으로 월성에 있으면서 남창(南牎) 김현성(金玄成,1542~1621)과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1562~1624)와 함께 금장대에 올랐다. 울산 등 곳곳의 적이 다 무너졌다는 보고를 듣고 기뻐하며 이 시를 지었는데, ‘今朝日南至 昨夜賊東回’구절이 있다. 신지제와 여러 사람들이 차운하였고, 나 역시 듣고는 뒤따라 시를 지었다.(戊戌冬 李公以陳御史接伴在月城 與金南牎玄成 申梧峯順夫同登金藏臺 聞蔚山等處賊壘盡空 喜賦此韻 有今朝日南至 昨夜賊東回之句 順夫諸君皆次之 余亦聞而追賦云 『聱漢集』卷1,「詩.排悶錄․次李五峯金藏臺韻」) 조선의 여러 문인들 역시 경주를 찾아 곳곳을 유람하며 금장대에도 올랐다. 특히 옥봉(玉峰) 권위(權暐,1552~1630)의 『玉峰集』卷1,「金藏臺」와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1553~1612)의 『松亭集』卷1,「元日在慶州 次李延陵君好閔韻」 그리고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의 『梅溪集』卷2,「金藏臺 二首」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도촌(道村) 강홍중(姜弘重,1577~1642)이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쓴 수기(手記)의 「동사록(東槎錄)」에 ‘1624년 9월 10일. 봉황대는 성 밖 5리쯤에 있으며, 인력으로 산을 만들어 대(臺)를 세운 것이다. 비록 그리 높지는 않으나 앞에 큰 평야가 있어 안계(眼界)가 훤하게 멀리 트이는데, 이를테면 월성ㆍ첨성대ㆍ금장대(金藏臺)ㆍ김유신묘가 모두 한 눈에 바라보이니, 옛 일을 생각하매 감회가 새로워져 또한 그윽한 정서를 펼 수 있다’ 그리고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1593~1646)의 『해사록(海槎錄)』 역시 1636년 9월에 봉황대에 올라 금장대를 아득히 바라보았으니, 모두가 임란 이후 1600년대 금장대가 바라보이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즉 조선의 금장대 모습은 역력하나, 이전 시대의 모습은 아쉽기만 하다. 금장대는 오랜 풍파의 역사를 안고 사라졌다가 현대에 와서 새롭게 재탄생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금장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추후 금장대에 관한 학술연구가 심도 있게 다뤄지길 기대해보며, 다음에는 금장대를 읊조린 한시를 감상해 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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