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부리터(야철지(冶鐵址), 제철 유적)’는 철을 생산하고 벼리는 모든 작업공정을 포함한 모든 제철유적을 말한다. 경주에는 다른 지자체에 비해 제철 유적이 많은 편이다. 전국적으로 온전하게 남아있는 쇠부리터 제철유적은 드문 가운데, 현재 파악되고 있는 경주의 제철 유적지로는 황성동(서울농업박물관에서 재현), 동천동, 외동읍 두 곳(녹동과 모화리 유적), 건천읍 용명리(석축형 제철로를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충북 음성군 감곡 철박물관으로 이건해 복원됨. 용곡댐 수몰 지구에서 발굴됐고 19세기 중엽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제철유적에서 발견됨)등이다. 제철 유적의 흔적은 대개 사라졌지만 외동읍 두 곳(녹동과 모화리 유적)은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동천동 유적은 통일신라시대, 황성동은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삼국시대로 밝혀졌다. 이들 쇠부리터 중에서 외동읍 두 군데는 쇠부리터가 온전히 남아있는 편이었으며 황성동과 동천동 유적지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정 문화재의 소중함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주에 산재하고 있는 가치있는 비지정유적에의 관심이 다시 한 번 절실함을 이번 제철 유적 취재에서도 통감했다. 경주 외곽이고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중요한 제철 유적이 빛을 잃어가고, 심지어 이웃 지자체에 그 값어치가 전도될 지경이다. 경주의 쇠부리터를 발굴하고 적극적인 보존과 활용에 애쓰고있는 김환대(41, 경주문화유적답사회 회장, 경주문화연구원장)회장과의 답사(지난 22일)를 통한 자문에 감사드린다. -‘쇠부리터’, 철장에서 철 제련 생산 하는 곳 ‘쇠부리’란 ‘쇠를 부리다’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쇠가 들어있는 토철(철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흙)이나 사철, 철광석 등에서 쇠를 녹이고 다뤄 가공하는 모든 제철작업을 일컫는다. 또, 철장에서 철을 채굴해 철을 제련 생산하는 곳을 ‘쇠부리터’ 라고 한다. 쇠부리를 하기 위해서는 원료인 철광석과 불을 지피는 숯, 제철시설, 경험 많은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숯과 철광석을 토둑 안에 집어넣고 풀무(불매, 쇠를 달구거나 쇳물을 녹여 땜질 등을 할 때 불을 지피는 기구)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때면 고열에 쇠가 녹아내려 ‘쇠똥(슬래그)’과 분리된 쇳물이 나온다. 이러한 쇳덩어리를 다시 열로 가공해 칼이나 화살촉과 같은 무기와 호미나 낫같은 농기구를 생산했다. -경주 녹동리 쇠부리터(야철지), 용광로는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까지 철 생산 가장 먼저 찾은 유적은 외동읍 녹동리 유적(외동읍 녹동리 산67). 이 유적은 경주에서 모화역을 못 미쳐 녹동리 척가 방면을 지나, 관문성을 따라 만날 수 있는 두산저수지 뒤편에 있다. 행정 구역상 울산시와 경주시의 접경지로 시내에서 50여 분 정도 소요된다. 두산저수지 앞 ‘녹동리쇠부리터’라는 말끔한 안내표지판을 따라, 관문성 성벽이 무너져있는 산 오솔길을 따라 5분 여 지나면 이윽고 녹동 야철지가 나타난다. 두산저수지를 내려다 보면서 오솔길을 걷는 즐거움 끝에 만나는 이 유적은 얼핏 보아서는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야산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유적을 조사발굴한 김환대 회장 같은 이가 없었다면 이러한 야철지가 이 산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울산에서는‘관문야철지’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오히려 울산에서 답사 코스로 자주 다녀간다고 한다. 녹동 쇠부리터 외관은 얼핏, 장작 가마터를 닮은 듯 했다. 고열의 핵심인 용광로 내부 곳곳에는 쇠똥(슬래그)이 흙과 함께 검붉게 뒤엉켜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실제의 쇠부리터는 흥미롭고 놀라웠다. 김환대 회장은 “녹동리 철지 인근에는 이곳 이외에도 철지가 두 곳 더 있었지만 두산저수지 내 두 곳이 수몰돼 버렸다고 합니다.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는 한 곳만 그대로 이건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지요. 이곳은 예전 관문성벽이 이어지는 울산과 경주간 길이었습니다. 야철지의 조건으로 그 첫째가 철을 생산할 수 있는 물이 풍부해야 하며, 철을 생산할 수 있는 흙이 좋은(토양 자체에 철 성분이 함량된)지역이었을 겁니다. 숯을 계속 피워야 했으므로 숲이 우거진 조건도 중요했겠죠. 따라서 이곳은 철을 수집하기도 용이하고 물도 가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은 안내자 없이는, 답사자들도 길을 찾지 못해 그대로 돌아가야만 하는 등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전혀 길 조차 나있지 않았고 매년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지난 5월,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곳을 김 회장의 자문을 바탕으로, 신라문화원과 포스코봉사단 문화재지킴이의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 관리 덕분에 잡목이 정리되고 유적 주변이 정비돼 진입로가 확보되는 등 유적이 잘 드러나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이 쇠부리터는 관문성이 지나가는 성 안쪽에 놓여져 있었던 것으로 성벽이 헐리고 저수지의 제방을 쌓았기 때문에 수몰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1975년 경주사적관리소에서 옮겨 복원한 것이다. 1978년 울산농지개량조합에서 착공한 두산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관문성 성벽 일부를 경주사적관리사무소에서 조사하고 이 유적도 조사한 바 있다. 토둑의 길이가 20m, 폭이 3.1m, 높이 3.1m로 조사된 유적 가운데는 가장 크다. 토둑의 중심부에는 방형의 화덕을 설치하고 중심부의 좌우 날개는 양끝으로 가면서 폭이 좁아지다가 경사를 이뤄 낮아진다. 토둑의 중심부 정면 쪽에는 쇳물이 나오게 사다리꼴 형태로 문이 나 있다. 김 회장은 “화덕의 뒤쪽으로는 돌을 쌓아서 만든 소형로의 감실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송풍관과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형태는 비교적 양호하며 완전에 가까운 용광로 형태입니다. 울산 달천의 철광석과 인근 치술령에서 숯을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큰 용광로로 쓸 수 있었습니다. 용광로는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까지 철을 생산했던 것 같습니다. 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관문성의 성벽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했다. -외동읍 모화리 쇠부리터(야철지)...녹동 유적에 비해 전체적으로 규모 더 크고 보존 상태 양호 외동읍 모화리 25-3. 원원사지로 가는 길 가에 복원된 조선시대 제철유구다. 이 유적은 외동읍 일대의 부족한 농촌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2001년 중앙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 조사됐다. 김 회장은 “모화리 유적이 좀 더 완벽하게 남아있는 편입니다. 녹동 유적에 비해 전체적으로 규모가 더 크고 보존 상태도 양호하지만 용광로 자체는 녹동리에 비해 다소 좁은 편”이라고 했다. 불을 땐 흔적이 더욱 선명히 남아 있었다. 쇠똥이 그대로 굳어있기는 마찬가지. 전체적으로는 녹동리 유적과 거의 흡사했다. 이 유적의 주변으로는 견고하게 보이는 보호 철책과 철강 지붕을 지었으나 불필요해 보였다. 오히려 유적이 잘 드러나지 않아 답답해 보였으며 유적지 보존과도 그리 유관해 보이지 않았다. 이 유적 역시 경주시의 외면을 받고 있기는 똑같다고 한다. 모화지 제철 유구는 제철로(쇠금부리 가마), 송풍 시설로 이뤄져있다. 제철로 벽체는 활석과 내화성이 강한 점토를 이용해 축조했고 벽체는 축조한 후에 두 번 정도 보수된 흔적이 확인됐다. 제련로는 잔존 높이가 270㎝정도다. 토둑의 외형은 진흙과 돌을 이용해 토담을 쌓듯이 만들고 화덕의 내부에는 진흙을 덧발랐다. 토둑은 녹동리 유적과 거의 동일하고 송풍구는 노의 북쪽 평탄부에서 확인됐다. 운영된 시기는 조사 결과 건물지 담장 밖에서 소옹편이 확인된 점과 삼국시대 제철 유구와의 구조적 차이점들로 보아, 조선시대로 밝혀졌다. 원래의 위치에서 약 70미터 떨어진 이곳으로 이전복원됐다.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까지 철을 생산해 냈다는 기록도 전한다고. -동천동 제철 유적지, 통일신라시대 청동제련로 확인 동천동 우방아파트 인근에는 도심에서 보기 어려운 공터가 하나 덩그러니 있다. 간단한 안내판 하나가 겨우 이곳이 제철 유적지임을 알려준다. 이곳은 1998년~99년 동천동 우방아파트 발굴조사시 드러난 야철지다. ‘발굴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청동제련로가 확인된 문화유적 보호 및 경관보호지역’인 것이다. 출토 유물 사진이나 당시 발굴의 흔적 관련 사진 몇 장 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도심 한복판에 이런 제철 유적이 있다는 것을 보다 상세하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의 환영을 받을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황성동 제철 유적, 제철유구에 아파트 건설되는 등 황성동 유적 거의 대부분은 파괴 황성동 제철 유적은 국내 최초로 발견되었고 가장 오래된 철·철기생산 관련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1989~1991년(국립경주박물관), 1996년(국립경주박물관), 1999년(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발굴 등 모두 3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정식 제철관련유적을 조사했으며, 이 유적의 발굴을 계기로 철생산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와 연구가 시작됐다. 이 유적에서는 주조제품을 제작하는 용해로와 함께 단조철기제작을 위한 단야로(鍛冶爐)까지 조사돼 철기제작 일괄 공정을 알 수 있으며, 1차로 얻어진 철원료를 가지고 한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철·철기생산이 이루어졌던 유적임에 틀림없다. 유적의 연대는 출토된 토기 등으로 보아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삼국시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철을 만들던 제철유구는 귀중한 역사자료로 평가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제철유구에도 아파트가 건설되는 등 황성동의 유적 거의 대부분은 파괴됐다. 철은 인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만큼 중요하다. 경주시에서 두 곳이나 제철 유적이 완전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은 매우 신선하다.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홍보해서 제철관련 유적지로, 역사교육 자료로도 충분히 활용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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