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캔커피라도 마시려고 편의점에서 들어섰더니, 누가 볼세라 손을 가려가며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아하, 로또 복권을 마킹하고 있었구나’ 무심한 척 힐끔 쳐다보니 아마도 속으로 절대자를 간절히 부르고 있는지 입을 연신 달싹이고 있다. 만약 불자(佛子)라면 로또 복권을 앞에 두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불렀을 테다. ‘부처님, 이번에는 꼭 대박이 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불러댔던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에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또 생각뿐이다. 중생의 간절한 부름에 오늘도 부처님은 법당으로, 편의점으로 바쁘게 뛰어다니신다. 부처님도 이토록 중생을 도와주려고 동분서주하시는데, 왜 우리 몸과 마음은 여전히 가난할까? 수행자나 신앙인이 기도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눈을 단정하게 감고 손을 가지런히 가슴에 모으고 속으로 나직이 원하는 바를 되뇌며 기도하는 모습은 본인도 그렇고 주변을 맑게 하는 힘이 있다. 온 정성을 다해 108배(拜)를 올리거나 홀로 묵상(默想)하는 광경은 그 자체로 빛이 난다. ‘우리 아들 대학 합격하게 해 주세요’, ‘무탈하게 이번 여행을 마칠 수 있게 해 주소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세요…’ 하는 우리의 기도는 얼추 비슷하다. 가정의 행복과 건강, 학문적 성취, 그리고 좋은 인연을 맺게 해 달라는 내용 등은 우리네 인생사 우선순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그 기도가 정작 대상에게 잘 접수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사실 부처님은 욕망을 끊고 또 끊어 부처가 된 분이다. 버리고 또 버려서 성인(聖人)이 되신 분에게 ‘(욕망을) 채우고 또 채워주세요’ 하고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과연 이루어질까? 이웃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기도하는 자[能禮]와 기도를 받는 자[所禮]를 전제로 한다. 불교의 경우에는 기도를 매개로 부처와 부처의 자식(佛子) 관계가 맺어진다. 자식은 부모에게 늘 뭔가를 요구한다. 그것이 필요하거나 타당할 때 부모는 그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자식이 온갖 아양을 떨거나 불쌍한 표정을 짓더라도 들어주면 안 되는 요구도 있기 마련이다. 부처는 다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자재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전생을 보고, 그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도 하고, 남의 마음속을 훤히 다 알며,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있는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 못 할 일이 결코 없다. 사실 멀리 있어도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이나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은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으로 대체 가능한 요즘이다. 축지법 같은 신족통(神足通)도 KTX나 자동차로 대신할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이런 능력만큼은 대체할 수 없는데, 그건 바로 누진통(漏盡通)이다. 뭔가 샌다는 의미의 누(漏)와 다 끝났다는 의미의 진(盡)이 만나, 모든 번뇌를 끊어 더 이상 번뇌하지 않는 능력이다. 물은 완전히 막아도 어디선가 새어나온다는 데서 번뇌의 속성을 보았다.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여놓더라도 피가 배어나오는 것처럼. 번뇌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움이 부처가 부처일 수 있는 유일하고도 중요한 능력이라면, ‘로또 당첨되게 해 주세요~’나 ‘우리 아들 ○○대학교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식의 기도는 기도처럼 보이나 엄격히 말해 번뇌일 뿐이다. 그런 번뇌를 부처님이 들어줬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쉽게 행하는 기적도 있다. 만약 당첨 확률이 0%인 로또는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첨 확률이 0.00001%로 올라간다면 사람들은 과연 복권을 구매할까? 사실 0%와 0.00001% 간의 차이는 거의 무시해도 될 수준이다. 흥미롭게도 로또의 당첨 확률(1/814만)을 백분율로 환산하면 0.00001%이란다. 벼락 맞을 확률(1/50만)보다도 낮다는 당첨 확률에도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들 때문에 매주 로또 판매액이 수백억에 이른다니, 우리가 행하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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