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이며 족장급의 무덤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에 있는 청동기시대 생생한 유적인 고인돌을 찾아 그 중 몇 곳을 다녀왔다.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청동기 시대의 체온을 느낀듯한 시간이었다. 우리나라 고인돌 유적은 2000년 유네스코 등재 한국의 세계유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주 각지에도 산재한 고인돌이 500여 기라는 사실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전국에서도 규모나 숫적으로도 우세한 고인돌 지역인 것이다. 그러나 경주에는 수많은 문화유적들에 가려, 소홀히 방치되거나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유적들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유적중 하나가 고인돌이다. 현재, 멸실되거나 훼손돼 가고 있는 실정이어서 안타까움은 더했다.
지난 19일, 천북면 오야리, 용강동 원지 유적, 안강읍 노당리, 천북 다산리 단계서원 등을 직접 찾아 논과 밭, 혹은 민가에서 오랜 시간동안 거대한 몸체로 버티어 온 청동기 시대 유적을 만났다. 대부분 노천에 있거나 사유지인 개인집 마당에도 있었으며 외곽지에 흩어져 있었다. 아직 고인돌에 대한 관심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흩어지고 사라져가고 있는 소중한 청동기 문화유적들에 대한 경주시의 관심과 보존 대책이 절실해 보였다. 매서운 겨울 한파가 맹위를 떨치는데도 자문과 답사를 위해 애써주신 김환대(41, 경주문화유적답사회 회장, 경주문화연구원장)회장께 감사드린다.
-고인돌, 청동기 시대 군장 권위 상징하는 무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쉽게 말해서, 고인돌은 ‘덮개돌을 받침돌로 괴었다’고 보면 된다. 땅에 받침돌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서 만든 것으로 청동기 시대 지배자인 군장이 죽으면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덤인 고인돌을 만들었다.
거대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들이 누렸던 권력과 부의 크기를 반영한 것으로, 무덤 속에는 주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기도 했다. 거대한 바위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支石)·묘역 시설·무덤방(墓室) 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무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된다. 고인돌은 모양에 따라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나눌 수 있다. 탁자식은 주로 한강 이북 지역에서, 바둑판식과 개석식은 주로 한강 이남 지역에서 볼 수 있으며 그 중 개석식이 우리나라에선 가장 많다고 한다.
-경주 고인돌, 어느 특정 지역이 아니라 경주 전역에 걸쳐 고루 산재
김환대 회장은 “경주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있으며, 현재 고인돌로 추정하고 있는 500여 기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표상 육안으로 확인한 것은 200여 기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방식 혹은 북방식으로 하부에 유물이 있거나 누가 봐도 고인돌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최근 조사의 경우, 학계 등에서 인정한 200기인 것이지요”라고 했다.
경주지역의 고인돌 현황으로는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동네별로는 효현동, 석장동, 광명동, 도지동, 동방동 등에 많이 분포돼 있으며 읍 단위로는 건천, 강동, 안강, 산내, 현곡 등에서 고루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천북면이 두드러진 양상을 보인다. 건천읍 방내리 고인돌군, 강동면 다산리 고인돌군, 도지동 고인돌, 용장리 고인돌, 이조리 선돌, 석장동의 경우도 원룸촌에 고인돌들이 박혀 있으며 효현동 소티고개 지나가는 길가, 양동마을 성주봉 정상, 구황동 황용사지 옆 독서당 올라가는 길가에도 큰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경주 전역에 걸쳐 어느 특정 지역이 아니라 고루 산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무방비로 방치되고 있어 홀대를 면치 못하고 있다. 최근 각종 공사가 많아지면서 위치 변동도 있고 특히 도로 개선시 파손의 예도 많다고 한다. 주민들은 경지정리나 농업용수로 등을 개설하면서 공사에 지장을 줄 경우, 포클레인 등을 동원해 고인돌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땅속에 파묻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일단 경주에 있는 고인돌의 현황 파악을 통해 일련번호라도 매겨야 합니다”
김환대 회장은 “경주의 고인돌도 주로 무덤들이 대부분이며 경주에는 개석식(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으로 덮은 형식) 혹은 혼합형 고인돌이 많은 편입니다. 내남면 화곡리 저수지 옆 지석묘 발굴 당시 결과로는 청동기 시대 칼, 잔 등이 출토됐습니다. 이로써 당시에도 사후 세계 내세관이 있어 부장품으로 넣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또,“전국적 고인돌 분포도에 비해 경주와 포항이 월등히 많은 편입니다. 그것은 형산강을 끼고 있어서이며 당시 넓은 평야가 펼쳐져있었고 사방이 분지인 원인에 기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환경적 요인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정주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여타 지역에 비해 경주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고인돌이 방치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화재로 지정을 하거나 향토자원으로 관리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주시에서는 관리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2000년 전후 문화유적분포지도 지표 조사시 기존 자료와는 달리 실제로 멸실해 버린 경우가 많았습니다”라고 하면서 고인돌의 역사적 의의를 짚었다.
“일단 현황 파악이라도 해야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비교적 상태가 좋은 고인돌은 정비를 해서 안내 간판이라도 깔끔하게 하고 관광 자원화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법은 일련번호라도 매기자는 것입니다. 고인돌 위치를 파악해, 경주 지역 고인돌 지도를 만들어도 되고 고인돌 탐방 코스를 만들어도 좋겠지요. 그나마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은 지금이라도 조사를 서둘러야 합니다”라면서 거듭 강조했다. 인근 포항의 경우는, 문화재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안내판과 현황 파악은 완료돼 있다고 한다. 고인돌 주변에 보호책을 설치하는가하면, 고인돌 지도 및 일련번호를 매겨 파악을 완료 한 것.
-안강읍 노당리 고인돌, 굄돌이나 전체 모양이 온전하게 보존
경주 고인돌 유적 전문가 송재중 선생(송재중 선생은 1990년부터 2015년까지 경주지역 고인돌 491기를 조사함)의 ‘경주 고인돌’자료에 의하면 ‘안강읍 노당1리에 위치하는 고인돌들은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굄돌이나 전체 모양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모두 3기의 고인돌이 민가 내에 위치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굄돌 4개가 확실하게 보이며, 덮개돌 아래에 넓직한 공간이 있다. 현재는 민가의 담장 바로 안에 있어 발굴이 한번 있었다고 하는데, 이 고인돌 밑에서 석검과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다른 고인돌 2기는 동네의 당산나무 옆, 무당집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석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다. 모두 굄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조그만 돌이 밑에 보여, 고인돌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현재는 무당의 기도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래에 경주 고인돌 유적 중 몇 군데를 소개한다.
1.건천읍 방내리 고인돌군, 민무늬토기 조각 1점만이 출토
건천읍 방내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군은 경부고속도로 건천휴게소 신축부지에 대해 1993∼1994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이다. 모두 6기의 고인돌이 산재하는데 가장 크기가 큰 덮개돌은 제2호 고인돌로서 화강암 재질의 장타원형이다. 출토된 유물은 6호 고인돌에서 민무늬토기 조각1점만이 출토됐다.
2.강동면 다산리 고인돌군, 문토기편 약간과 타제석기 등 발견
강동면 다산리와 근처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군으로 다산리에 4기와 바로 측근의 포항시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4기의 고인돌을 함께 일컫는 유적이다. 출토유물은 무문토기편 약간과 타제석기 등이 발견됐다.
3.용강동 원지 유적 내 고인돌, ‘성혈’뚜렷해 고인돌 확실
김 회장과 함께 가장 먼저 찾은 고인돌은 도심 한 가운데있는 용강동 원지 유적 고인돌이었다. 원래 주변에는 3기가 있었는데 주변 정비 과정에서 파손되거나 옮겼을 것으로 추정하며, 지금은 한 기를 볼 수 있었다. 이 고인돌은 바로 옆에 무덤이 하나 있어서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덮개석에는 성혈이 여러개 보였다. 고인돌에는 성혈이라는 바위구멍이 있는데, 이는 조상숭배와 풍요다산을 기원하며 농경의례 과정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4.강동면 다산리 단계서당 고인돌, 전형적인 지석묘의 형태
이 고인돌은 단계서당 뒤 언덕의 수령 300년이 넘는 나무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고인돌 역시 전형적인 지석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비교적 보존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상태도 매우 좋은 편이었다.
5.내남면 화곡리 고인돌,작은 돌을 사방에 깔아 묘역 만들어
화곡리 저수지 확장 공사시 조사됐는데 작은 돌을 사방에 깔아 묘역을 만든 것이 특이하며, 유물들이 출토됐다. 화곡리 고인돌은 길이 3.6m, 너비 3.25m, 두께 1.8m의 큰 돌무덤이다. 기원전 6세기 청동기시대인 것으로 추정됐다.
6.천북면 오야2리 고인돌, 바로 앞에 비석 세워져있어 경주 고인돌 방치 실태 그대로 보여줘
천북면 오야2리 소광사 가는길 일대에서 만날 수 있는 고인돌은 모두 8기가 흩어져 있었다. 한 민가에는 담장석으로 벽체와 연결돼 있기도 했다. 개인소유의 밭에는 민묘와 비석이 있었고 그 바로 주변으로 두 개의 거대한 고인돌이 있었는데 고인돌 바로 앞에 비석이 세워져있어 경주 고인돌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방치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고인돌은 고임석이 분명히 드러나있는 확실한 형태의 고인돌이었다. 바로 이웃 밭고랑 사이로는 갈라지고 깨진 고인돌도 있었다. 고인돌이 깨진 경우는 인위적인 것으로 추정됐다.
경주에 있는 고인돌들은 문화재도 아니고 비지정 유물이지만 경주시가 관리해야 할 관리 대상이다. 고인돌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은 경주시의 무관심도 큰 문제지만, 주민들의 유적 보존의식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와 문화재 전문가들은, 남아 있는 고인돌이라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정확한 지표조사를 벌인 뒤 훼손여부를 점검하는 등 보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