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덕왕 때 스님인 월명사(月明師)는 화랑의 낭도이기도 하였다. 주옥같은 향가를 남기고 피리[笛]를 잘 불어 신통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주로 사천왕사에서 지내면서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대문 앞 큰길을 지나는데 달이 그 소리에 감복하여 운행을 멈추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감통」편에 의하면 경덕왕 때 두 해가 나타나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왕은 조원전에 정결한 단을 만들고 인연있는 스님을 기다렸다. 그때 월명스님이 밭둑을 걷고 있었는데 왕이 이를 보고 불러와 단을 열고 계(啓)를 짓게 하였다. “소승은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을 뿐 알고 있는 것은 향가 뿐 성범(聲梵)*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하옵니다.” 그래도 왕이 권하자 도솔가를 지어 올렸다. 이후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월명스님은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향가를 지어 재를 올렸더니 회오리바람이 일어 종이돈이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향가가 바로 제망매가(祭亡妹歌)이다. 필자가 대학재학 시절 이 향가를 양주동 선생이 풀이한 내용으로 공부하였다. 이를 다시 오늘날의 형식으로 고쳐보면 대개 이런 내용이다. “사람이 나고 죽는 길은 여기 있으니 두렵구나.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하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 가지에 피어났지만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것이니 나는 불도(佛道)를 닦아 기다리겠노라” 55여 년 전 필자에게 누나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우랴 동생들을 돌보랴 무척 애를 쓰던 참 고마운 누나였다. 어느 해 초겨울 이맘 때였다. 아마 독감을 앓았던 것 같다. 변변히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첫눈이 내리는 날 그만 우리 가족 곁을 떠났다. 스님의 이 제망매가를 공부하면서 누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던 것이 어제 일인 듯하다. 또 『삼국사기』 「열전」에는 이곳 낭산에 살던 백결선생(百結先生)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백결선생은 아주 가난하여 의복을 백 군데나 기워 입었기에 당시 사람들이 백결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찍이 즐겁고 성나고 슬프고 불만이 있으면 모두 거문고로써 풀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이웃에서 곡식을 찧으면 그의 아내가 방아소리를 듣고 이렇게 불평을 했다. “남들은 모두 찧을 곡식이 있는데 우리만 곡식이 없으니 어떻게 설을 쇠리오?” 백결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죽고 사는 것에는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 그것이 와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가도 좇을 수 없는 법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마음 아파하는가?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아소리를 내어 위로하겠소” 백결선생은 곧 거문고를 타서 방아소리를 내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의하면 이곳 사천왕사의 신장상을 양지스님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을 비롯하여 전탑의 기와와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을 조성하였다. 그 외에도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도 양지 스님이 썼다고 한다. 조각, 서예에 두루 능통하셨던 것이다. 또, 낭산 서쪽 기슭에는 신라 하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독서당이 있다. 향가를 잘 하는 월명스님,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 신의 경지에 이른 조각가 양지 스님, 뛰어난 문장가 최치원 등 신라를 대표하는 예술인들이 이곳 낭산 신유림에서 신선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나 보살의 음성이나 경전을 읽는 소리 또는 범패(梵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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