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저녁밥을 먹고 난 후 이웃끼리 모여 호롱불 아래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주로 이야기 소재는 귀신이 아니면 도깨비였다. 어린 나는 숙제도 잊고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곤 했었다.
“동천에 있는 사람이 숲머리에 갔다가 북천 거랑을 건너 늘 다니던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글쎄 아무리 가도 마실이 보이지 않은 거야. 갑자기 머리털이 곤두서며 덜컥 겁이 나더군. 몇 번이나 엎어지고 자빠지다보니 어서 집에 가야 하겠다는 생각뿐이었어. 닭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애기청소지 뭐야. 자칫 물귀신이 될 뻔 했지.”
“소복을 입은 사람이 앞서 가면서 따라오라고 하데. 물을 건너야 하니 바지를 걷어라고 하더군. 바지를 걷어 올리고 따라가니 가시밭이야. 다시 한참을 가다가 이번에는 가시밭이니 아랫도리를 단속하고 따라오라기에 갔더니만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더군. 계속 소복을 입은 그 사람을 따라가는데 동녘이 뿌옇게 밝아오는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동묘지였어.”
“……”
옛 사람들은 온통 신과 함께 생활하였다. 집 안에 모신 신만 하더라도 운수를 관장하는 성주신(城主神)을 비롯하여 아기를 점지해 주는 삼신(三神) 또는 산신(産神), 부엌과 불을 관장하는 조왕신(竈王神), 집터를 지켜주는 터주신, 집안의 재복을 담당하는 업신(業神), 대문을 담당하는 문간신(門間神), 심지어 화장실에도 측간신 또는 정낭각시라는 귀신이 있었다. 집밖을 나서면 마을을 지켜주는 신으로 당신(堂神)·장승·솟대 등이 있었다. 나라에서도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을 두고 나라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셨다.
이곳 낭산에는 신들이 노닐던 신유림(神遊林)이 있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제18대 실성니사금 12년(413) 8월에 이런 기록이 있다.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 멀리서 보면 누각같이 생겼고 향기를 자욱하게 품어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신선들이 내려와서 노니는 곳이니 반드시 복 받을 땅이로다.’ 이후로는 이 산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
흔히 ‘낭산’이라고 하면 ‘남산’의 잘못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낭산’과 ‘남산’은 전혀 다른 산이다. 남산은 서라벌의 남쪽에 있는 금오산이고 낭산은 월성과 가까운 곳으로 보문동, 구황동, 배반동 사이에 있다.
통일 이전 서라벌에 5개의 산이 있었는데 동에는 토함산(동악), 서에는 선도산(서악), 남에는 금오산(남악), 북에는 금강산(북악)이다. 이 네 개의 산이 서라벌을 에워싸고 그 가운데에 낭산이 있다. 낭산은 신라시대에는 3사(三祠) 가운데 대사(大祠)를 받들던 중악(中嶽)으로 서라벌의 진산(鎭山)이었다.
낭산은 이리가 엎드려 있는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리 랑(狼)]자, [뫼 산(山)]자를 써서 ‘낭산(狼山)’이라 한다.
가운데가 잘록한 누에고치를 길게 잘라 엎어 놓은 모양으로 높이가 해발 115m, 102m, 100m의 3개 봉우리를 중심으로 긴 능선이 남북으로 이어진 야산이다. 능선이 부드러워 정겨움이 가는 부담 없는 산이기도 하다.
이 낭산은 선덕여왕릉을 비롯하여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 사천왕사지, 중생사지, 황복사지, 낭산마애보살삼존좌상, 최치원선생이 공부했다는 독서당 등 여러 문화재가 널려있는 산이다.
낭산 주위의 햇볕 따스한 곳을 골라 마을이 생겨났는데, 산 서쪽에는 배반마을, 그리고 산 동쪽에는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降仙)마을, 황복사가 있었다는 곳의 황복마을이 있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경덕왕 때에 「도솔가(兜率歌)」·「산화가(散花歌)」·「제망매가(祭亡妹歌)」 등의 향가를 지었고 피리를 잘 불어 달조차 가기를 멈출 정도였다고 전하는 월명(月明)스님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가 살던 사천왕사 앞 동네를 월명리(月明里)라 불렀다. 이곳 낭산 기슭 어딘가는 그 옛날 백결선생도 살았다고 하는데…. 많은 이야기와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이 낭산은 사적16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