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쓰기 -이정록 물땅바닥에 애호박 하나씩 놓고 가는 호박넝쿨의 가로쓰기가 좋다. 바다를 건너는 배의 하얀 물띠가 좋다. 대륙을 잇는 철길의 가로쓰기가 좋다. 네게서 건너오는 따스한 눈길이 좋다. 풀밭을 찾아가는 누 떼의 삐뚤빼뚤한 밑줄이 좋다. 강까지 달려온 얼룩말들의 천리길 흙먼지가 좋다. 강남에서 날아온 지친 제비를 앉히려고 겨우내 흐헝흐헝 울던 전깃줄의 가로쓰기가 좋다 네가 고개를 끄덕일 때보다는 가로저을 때, 더 예쁘다. -자연에서 배우는 문장연습 일찍이 이백은 “대자연이 나에게 문장을 빌려주었다(大壞假我以文章)”고 그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말한 바 있지만, 이 시는 대자연 속에 놓인 인간, 동물, 식물, 사물들의 움직임을 받아쓰고 있다. 시인은 오늘 가로쓰기부터 먼저 배울 모양이다. 가로쓰기는 통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가는 것이지만, 그 반대방향으로 쓰는 것도 무방하다. 천지간 자연의 문장이 그렇지 않겠는가. 전반부 1행부터 5행까지를 보자. 먼저 시인은 개울가 “습지(물땅바닥)에서 애호박을 낳아놓고 기어가는 호박넝쿨”을 보다가, “바다를 건너는 배의 하얀 물띠”로, 이번에는 “대륙을 잇는 철길”로, 다시 옆의 “네(연인)게서 건너오는 따스한 눈길”로 바꾸면서 가로쓰기 문장을 연습한다. 이 가로쓰기 연습은 대양과 대륙으로 무한히 확장되기도 하고 또 바로 옆의 사람으로 무한히 축소되기도 한다. 천지간 눈만 돌리면 연습할 문장들도 참 많구나. 후반부 6행부터 11행까지는 음악으로 치면 2절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1절인 1행부터 5행까지의 호흡을 그대로 유지한다. 대상도 많고 시공간적 배경도 거의 무한이다. “풀밭을 찾아가는 누 떼의 삐뚤빼뚤한 밑줄”, “강까지 달려온 얼룩말들의 친리길 흙먼지”, “제비를 앉히려고 흐헝흐헝 울던 전깃줄”, “가로젓는 너의 고개”까지 시인의 가로쓰기 연습은 끝이 없다. 자연의 글씨는 교실에서 쓰는 것처럼 그렇게 온전하지가 않다. 삐뚤빼뚤하고, 길고, 장엄하고, 다정하기끼까지 한 필법을 가진다. 그만큼 삶에 더 밀착된다. 대자연의 노트는 끝이 없고 변화무상하기 때문이다. 이는 책상 앞의 가로쓰기와는 얼마나 다른가? 천지는 오늘도 우리에게 가로쓰기 연습을 하라고 이렇게 많은 경전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만 그 연습을 끝내버린다. 가로쓰기 하나만 해도 이렇게 배울 수가 있는데, 쓸 것이 없다고 얼버무리는 태도는 또 무어람? 나무야, 풀들아, 하늘아, 해야, 그리고 감자야, 내 오관을 스쳐간 모든 것들아, 미안하다. 고개를 들 수 없구나. 좀 더 겸손하게 배울게. 한 수 가르쳐다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숙이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 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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