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펼치기가 거북하고 TV 보기가 민망하다. 나라가 온통 쑥대밭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옛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남긴 명언으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자주 이 말을 쓰면서 유명해졌다. 라틴어로 ‘현재에 충실해라’라는 의미이다.
오직 현재만이 나의 삶이다. 내일 무엇이 되느냐보다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나만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다. 날씨가 꽤 쌀쌀하지만 집을 나서야 했다. 행선지는 효현동삼층석탑이다.
무열왕릉을 지나 소티고개를 넘으면 바로 효현교이다. 이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오른쪽 산 밑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 1㎞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바로 가면 법흥왕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외와마을로 가는 길이다. 마을 이름 ‘외와(外瓦)’는 기와를 굽는 가마의 바깥쪽에 있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하는데 ‘외외마을’이라고도 한다. 이정표에는 모두 ‘외외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좁은 길을 따라 400m 가량 올라가서 작은 다리를 건너 바로 좌측으로 민가 앞을 지나면 서편 소나무 사이에 탑이 보인다.
충효동에서 경주대학교 쪽으로 가다가 경주대학 바로 못 미쳐 언덕에서 좌회전하여 외외마을로 들어갈 수도 있다.
경주효현동삼층석탑은 현재 보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 뒤(북쪽)로는 넓은 밭으로 사찰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은 충분하지만 절터로 여겨지는 석재 등의 흔적은 드물고 탑만 홀로 우뚝하다. 이곳은 애공사지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영경사지와 마찬가지로 조선 영조 6년(1730) 경주김씨 가문에 의해서 애공사지로 이름 붙여진 곳이다.
이 탑은 이중 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는데, 기단부와 탑신부는 비교적 온전하지만 노반을 포함하여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탑은 전체적으로 비례도 적절하며,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석탑으로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옥개받침 층급이 4단으로 줄고, 상·하층기단의 탱주(撑柱, 받침기둥)가 1주로 줄어들며 규모가 작아지는 등 후기 신라석탑 양식이다.
지대석과 면석은 모두 ‘一’자형으로 각 면에 1매씩 모두 4매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은 3층으로, 각 층 모두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씩 모두 6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층 탑신은 네 모서리에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만 새기고, 흘림기법과 문비(門扉)* 등 장식은 없다. 2층과 3층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낸다. 옥개석은 각 층 모두 층급받침이 4단이며, 상면에 각형의 2단 탑신받침이 있고, 낙수면 경사는 완만하게 이루다가 끝에 살짝 반전하고, 귀마루의 합각선이 뚜렷하다. 물끊기홈은 없으며 네 모서리에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도 없다. 직접 확인할 수는 없으나 3층 옥개석 위 중앙에는 원형의 찰주공이 뚫려 있다고 한다.
신라 초기 석탑과 비교해 볼 때 부재의 수가 적으며, 상·하 기단 면석에 탱주가 1주로 줄어들고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아지는 등 시대적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9세기 신라 왕경을 벗어난 인근지역에 비교적 작은 규모의 탑들이 등장하는데, 이 탑은 경주 남사리 삼층석탑(보물 제907호)과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신라 석탑의 구조적 특징에서 본다면 석탑의 크기가 축소되면서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상하층 탱주 1:1의 석탑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 탑은 1973년 10월 25일부터 12월 28일까지 해체 복원된 적이 있는데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2004년에 하층기단 갑석 동남면 결실된 부분을 새로운 석재로 보완하여 보수정비를 하였다.
*석탑의 1층 몸돌에 상징적으로 여닫게 되어 있는 문짝을 표현한 것으로 안에 사리장치를 봉안하고 있다는 표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