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4년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자옥산(紫玉山)이 뒤에 있어 ‘옥산(玉山)’이라 사액(賜額)받았으며, 현재 잠와(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의 후손인 종손 이해철(李海轍,1949년생)씨가 독락당을 맡고 계신다. 『회재집(晦齋集)』「연보(年譜)」에 의하면, 맑은 물이 흐르는 독락당 주변에는 탁영대(濯纓臺)·징심대(澄心臺)·관어대(觀魚臺)·영귀대(詠歸臺)·세심대(洗心臺)가 있으며, 관어대 위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첫째 칸을 정관재(靜觀齋)·둘째 칸을 계정(溪亭)이라 한다. 원래 독락당은 회재 선생의 부친 이번(李蕃,1463~1500)이 주변 산세의 아름다운 수목과 맑은 시냇물이 어우러진 곳에 정자를 지었고, 그의 아들 역시 고향에 돌아와 유업을 이어받아 산수와 학업을 계승하였다. 훗날 퇴계의 후손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1768~1844)은 옥산서원을 찾아 퇴계의 스승인 회재선생을 참배하고, 계정 주위를 유람한 후 그 아름다움에 탄복해 「옥산구곡」시를 짓는다. 이가순의 「옥산구곡」 서문을 보면, 元氣東都好毓靈(원기동도호육령) 동도의 타고난 기운은 영험한 기운을 기르고 紫山增重紫溪淸(자산증중자계청) 자옥산은 거듭 자옥의 맑은 시내를 더하였네 孤舟欲泝眞源去(고주욕소진원거) 돛단배가 물길 거슬러 참 근원을 향하니 欸乃新聆曲曲聲(애내신령곡곡성) 사공의 뱃노래소리 굽이굽이에 들려오네 동도의 빼어난 기운은 특출난 인물(회재선생)을 기르고, 특히 자옥산과 맑은 시내가 영험함과 아름다움을 더한고, 돛단배가 세찬 물줄기를 굽이굽이 거슬러 오르며, 사공의 노랫소리에 구곡의 흥취는 더해만 간다. 이어서 계정을 중심으로 제1곡 송단곡(松壇曲)·제2곡 용추곡(龍湫曲)·제3곡 세심대곡(洗心臺曲)·제4곡 공간곡(孔澗曲)·제5곡 관어대곡(觀魚臺曲)·제6곡 폭포암곡(瀑㳍巖曲)·제7곡 징심대곡(澄心臺曲)·제8곡 탁영대곡(濯纓臺曲)·제9곡 사암곡(獅巖曲)이 순차적으로 물굽이가 등장한다. 이때 5곡의 관어대는 정관재와 계정이 자리하며, 특히 계정은 맑은 계곡이 바라보이는 공간으로 옥산구곡의 중심지가 된다. 이가순은 옥산구곡 가운데 5곡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五曲溪亭境更深(오곡계정경갱심) 오곡의 계정 주변엔 수심 더욱 깊고 澆花剖竹葆園林(요화부죽보원림) 꽃과 대나무들이 원림에 무성하다네 臨臺永日知魚樂(임대영일지어락) 종일 관어대에 있자니 물고기의 즐거움 알겠고 活潑天機契聖心(활발천기계성심) 활발한 천기(天機)는 성인의 마음과 어울리네 구곡 경영의 인물과 5곡은 밀접한 공간으로 구곡의 중심이 된다. 계정 앞은 다른 곳과 달리 수심이 깊고, 주변의 꽃과 대나무가 조성된 원림은 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종일 관어대에 앉아 물속 물고기의 노님을 보면서 자연의 이치와 도리의 마땅함에 대해 배우고 스스로 성인과 같은 넓은 마음을 견준다. 또 천기(天機)는 자연 그대로의 성품을 말하는데, 『중용』의 연비어약(鳶飛魚躍:솔개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수면을 뛰어오른다)의 정신을 내포하는 만큼 계정의 경치를 활용한 마음수양이 돋보이고, 어락(魚樂)은 장자(莊子) 외편(外篇) 추수편(秋水編)에 등장하는 莊子와 혜자(惠子)사이의 대화에 등장하는 참된 앎에 대한 자문(自問)이다. 조선의 구곡문화는 1183년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에 기인하였고,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의 운문구곡(雲門九曲)과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가 최초다. 이후 17~18세기에 이르러 구곡문화가 절정을 이루는데, 그 와중에 이가순의 「퇴계구곡(退溪九曲)」「도산구곡(陶山九曲)」「원명구곡(原明九曲)」「소백구곡(小白九曲)」그리고 옥산구곡 등이 대거 등장한다. 이 시기에 옥산구곡을 비롯 이정엄(1755~1831)의 양좌동구곡 그리고 곡산한씨의 석강구곡과 보문동의 구곡 등 지역의 문인들에 의해 경주의 구곡이 대거 등장하고, 주변 언양의 도와 최남복(1759~1814) 백련구곡과 천사 송찬규(1838~1910) 반계구곡 그리고 포항 덕동마을의 계옹 이헌속(1722~1793) 덕계구곡 등이 그 영향아래에 있었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구곡문화는 선비의 고급문화 가운데 하나로 수많은 문인들이 전국적으로 구곡을 경영하였다. 특히 옥산구곡이 갖는 의미로 회재선생 이후 퇴계의 후손이 옥산을 찾아 구곡시를 지은 일은 참으로 놀랄 일이며, 회재학이 퇴계학으로 이어지는 매개가 되는 조선유학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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