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몸을 잔뜩 옴츠리게 한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법흥왕릉을 찾아 길을 나섰다. 충효동 쪽으로 방향을 잡아 경주대학교에 이르기 전 좌측 길로 접어들면 법흥왕릉에 이르게 된다. 이 왕릉은 고속도로가 건너다보이는 선도산 서남쪽 끝자락 조용한 농로 안쪽 후미진 솔숲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건너편 마을에서 보면 법흥왕릉이 있는 이곳 산의 형태가 용이 누워서 구슬을 굴리는 형태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이 산을 와산(蛙山) 또는 누불미, 너불미, 와미(臥尾)라고도 한다.
외진 곳일 뿐더러 꺾어 들어오는 길 입구에 있던 표지판 외에는 왕릉에 이르는 길 안내가 되어 있지 않다. 진입로가 좁아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고 주차장도 협소하다. 필자와 같은 서민이 임금을 알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주차를 하고 추수가 끝나 텅 빈 논둑길을 따라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는데 합판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선 경고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쓰레기나 휴지를 논에 버리지 말고 길에 버리세요. 논 주인이 다 치워드립니다. 그런데 안 된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버리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올라오는 동안 농로 주변이 참 깨끗했다. 그런데 ‘옥의 티’, 배수구 안에 빈 생수병이 하나 버려져 있다.
논 주인이 자기 논 주위에 버려진 쓰레기로 농사에 지장이 있다고 해서 이런 경고문을 적어둔 것만 아니리라.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지구의 상처가 되고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나 자신의 상처가 됨을 모두가 알았으면 하는 것이 논 주인의 생각일 것으로 믿고 싶다.
능으로 다가가는 길이 오르막이지만 그리 힘이 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주위가 너무 고요하다. 인기척은 물론 새소리,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법흥왕은 말년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짓고 출가하여 법호를 법운(法雲), 자를 법공(法空)이라 했다. 왕비도 출가해 법명을 법류(法流)라 하고 영흥사에 거주한 것으로 『삼국유사』 「왕력」편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법(法)’은 ‘불법(佛法)’을 의미한다.
불교 기본교리인 삼법인(三法印)이란 것이 있다. 세 가지 변할 수 없는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 그것이다.
삼법인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제행무상이란, 본래 존재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즉, 만들어진 모든 것은 그대로 있지 않고 생성과 소멸 등의 변화를 계속한다.
제법무아란, 모든 것에는 절대적인 나(我)가 없다. 즉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관관계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자유롭지 않고 고통스럽다.
열반적정이란, 무상과 무아를 깨닫고 온갖 고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경지에 도달한다. 이곳에 묻힌 법흥왕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경지를 넘어 열반적정의 경지에 있다.
신라의 고분은 6세기를 중심으로 그 이전까지는 평지에 조성하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형식이었다. 그러나 법흥왕 대 이후부터는 평지를 벗어나 산기슭으로 옮겨지고 내부형식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뀐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그리고 왕릉의 소재지나 장례지가 주변에 있던 사찰을 중심으로 방위·산 이름·지역명 등으로 기록했다. 이는 이때 공인된 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법흥왕릉은 능선 사면을 그대로 이용하여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봉분 형태는 남북이 긴 장축의 타원형이다. 봉분 크기는 장축이 13m, 높이가 3m정도 되며 능 주위를 노송들이 둘러싸고 있다. 봉분 아래에 직경 30cm 내외의 할석이 노출된 것으로 볼 때 호석을 돌린 듯하다. 왕릉 앞의 석물들은 후대에 만든 것이다. 그 앞으로 표석과 안내판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 뒷부분은 두둑으로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 왕릉 뒤쪽의 담장인 곡장(曲墻)과 유사하다. 그 바깥쪽으로는 배수구를 파 놓았다. 경사가 다소 심한 지역이라 홍수 등으로 토사가 밀려 내려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와 같은 시설을 한 듯하다. 이와 같은 형태로 능묘를 조성한 사례는 신라왕릉의 경우 법흥왕릉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