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라 하면 울주군 언양읍‘반구대(盤龜臺) 일원’및 대곡천을 끼고 펼쳐지는 반구대암각화와 주위의 아름다운 절경을 흔히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대곡천을 따라 반구대암각화까지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머물고 찾았던 반구서원(盤龜書院)과 집청정(集淸亭)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곳 반구대 일원이 옛날‘경주부’에 속했다는 새로운 사실과‘삼현(三賢, 圃隱 鄭夢周·晦齋 李彦迪·寒岡 鄭逑)을 모신 반구서원 건립과정에서 모든 일을 맡아 주관한 것은 언양 유림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경주 유림들이 있었다는 신선한 울림과 함께 경주사람에게는 자부심으로 다가온다. 경주 일신서당 훈장 오상욱(부산대학교 한문학과 박사과정 수료)의‘盤龜書院 建立과 盤龜臺 象徵化에 대한 小考’에서 18세기 서원의 남립(濫立)과 지방의 언양 유림들이 재지사족과 공조해 포은 선생과 반구대의 관계를 천착하고 경주의 회재 선생과 한강 선생의 얘기를 미화해 반구서원 건립의 정당성을 확보한 사실을 밝혔다. 이에 대해선 사실적 사료를 근거로 객관적 고찰을 했으며 또 이들 유림의 노력으로 나타난 반구대 상징화에 대한 의미를 고찰한 바 있다. 이번호에서는 권위있는‘한국한문학연구’62집에 게재된 이 논문을 바탕으로 발췌·인용해 반구서원 건립의 배경과 핵심으로 활약한 경주 유림들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오상욱 박사의 자문과 함께 구성했음을 밝힌다. -반구서원‘삼현’에 얽힌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 빼어난 경치와 조선 유학의 도통연원 환기시켜 줘 경주에서 남산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옛날 경주부에 속했던 언양의 ‘반구대 일원’이 나타난다. 경주부에 속했다는 기록은 화계 류의건 선생의‘반구암기’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경주부 수 백리 안에 많은 명승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기이하고 특별한 절경은 반구대만한 것이 없었다. 그곳은 경주부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져 있으며,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며 …, 마침내 동도의 제일 기이한 경관이 되었다.’-이하 하략. 반구대 일원은 경주와 가까운 언양 경계에 있고 깎아 지르는 듯한 바위와 휘감아 도는 물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며 주변에는 반구서원과 집청정(集淸亭) 등이 자리하며, 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명승지로 오늘날도 유명하다. 또 반구대에 석각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성명과 집청정의 시판(詩板)들, 게다가 『집청정시집』을 보면 예전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긴 곳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반구대 물길 맞은편에 집청정이 자리하고 그 아래쪽에는 ‘삼현(三賢)’을 모신 반구서원이 있다. 반구서원은 삼현에 얽힌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빼어난 경치와 조선 유학의 도통연원을 환기시켜 주었으며, 흔히 반구서원을 ‘삼현사’라고도 부른다. -반구서원 건립기와 건립배경 언양의 재지사족이자 유림의 일원이었던 김지와 이위를 비롯한 유림들이 반구대에 모여 서원건립을 도모하였고, 1702년부터 1729년 사이에 포은과 반구대의 천착이 이뤄줬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천착이 바로 ‘반구대 상징화’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 언양의 유림들은 울산부의 구강서원 건립과 사액 받은 일에 대해 자극받아, 언양에도 서원을 세워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공고히 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언양의 여러 가문들이 모여 논의하고 1712년에는 언양의 반구대와 관련된 삼현을 모신 반구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동시기에 집청정이 건립되면서 반구대 상징화는 절정을 이뤄 반구대를 찾는 문인들은 더욱 많아진다. 반구대는 예전부터 빼어난 경치로 천연의 자태를 드러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1713년 경주최씨 최신기가 집청정을 짓고 반구대의 석각을 조성해 포은과 연관된 언양의 반구대를 알리는데 더욱 노력하였고, 언양 및 주변의 문인들이 찾아오면서 더욱 알려졌으며, 이후 여러 문인들 가운데 회재의 후손과 한강의 문인들이 반구대를 찾아 서원에 참배하고 반구대 일원의 경치를 즐겼다. -언양과 관련되면서 충절과 정치와 학문의 사표로 삼을만한‘삼현’필요 오상욱 훈장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김지의 서원건립 과정 등을 살펴보면, 18세기에 서원이 남립(濫立)되었지만 지방 유림의 입장에서 서원 건립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지방의 발전과 후학 교육을 담당한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반구서원 건립은 유림으로서 지방학문양성을 위한 의도적 행동이었으며 포은과 반구대를 천착하면서까지 언양과 반구대를 연결짓고자한 의도”였다고 하면서 “언양은 학문이나 정치적으로 걸출한 인물이 드물었기에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언양과 관련되면서 충절과 정치와 학문의 사표로 삼을만한 삼현이 필요했지요. 즉 포은 선생은 학문과 충절 그리고 언양의 유배를, 회재 선생은 성리학의 도통 그리고 이웃 고을(경주)의 명현으로서, 한강 선생은 퇴계의 문인 그리고 우재학과 회재학의 양동문인과 긴밀한 관계인 점 등을 내세워 여러 가문이 힘을 모아 서원 건립을 도모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상욱 훈장은 또 “전국의 문인들을 반구대로 불러들이면서 반구대 상징화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즉 반구대의 상징화는 서원 건립과 포은의 관계에 얽힌 언양유림의 순수하지만 모순된 마음에서 빚어진 결과였으며 이는 단순히 지방 유림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지사족과 가문 존속의 연관관계에 의한 집단행동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반구서원 역시 1868년(고종 5) 울산의 여러 서원이 훼철될 때 이를 피해가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회재·한강 선생 등 경주양동문인에게 상량문 등을 받아 서원 건립행위에 대한 당위성 보태려 한편, 김지는 언양 유림의 뜻을 대변해 말하길, 포은은 언양에 유배와 이곳 반구대를 소요하며 자취를 남겼고, 회재는 본도에 어진 정사를 베풀었으며, 한강은 이곳 반구대에 머물러 살고 싶다는 뜻의 편지글 구절을 언급하면서 언양 유림들이 반구서원에 삼현을 배향한 것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서원 건립에 동참한 언양의 유림들은 회재·한강 선생과 관련된 경주양동문인에게 상량문 등을 받아 서원 건립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보태려했다. 하지만 여기서 오상욱 훈장은 “반구대에 관한 자료조사를 하면서 위에서 주장하는 반구서원 배향의 이유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유림의 주장대로 만일 삼현께서 직접 반구대를 다녀갔다면 어째서 삼현이 남긴 글에 가운데 반구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었을까 하는 부분이었죠. 또 삼현 배향의 근거가 부족한 채, 미화되어 확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언양 유림들은 포은 선생을 서원의 주향자로 선택한 직접적인 이유로, 학문과 충절로 뛰어나면서 언양에 유배 온 사실을 근거로 하였고, 회재 선생은 경주 출신으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울산을 교화시켰으며, 한강 선생은 편지글에서 머물러 살고 싶다는 글귀 등을 언양과 관련된 구체적 근거로 들어 배향의 이유로 삼았으니까요” -회재 이언적 선생은 이웃고을의 명현이자 학문적으로 숭상되는 인물로 반구대와 결부시켜 배향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회재 선생이 본도(本道)에서 덕화를 베풀어 훌륭한 정사가 있었다고 설명하지만, 경상도관찰사를 지내며 언양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역이 덕화를 입었고 회재집과 편지글 어디에도 반구대에 들러 경치를 감상한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회재는 이웃고을의 명현이자 학문적으로 숭상되는 인물로 역시 회재와 반구대를 결부시킨 것이지요. 그리고 한강 정구 선생이 반구대에 머물러 살고 싶다는 뜻을 편지 중에 드러내었다 설명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를 밝힐 편지글이 있는데, 김지와 박문상이 옥산을 찾아 한강의 편지글을 읽은 것으로 아래와 같다. ‘경주로 길을 잡아 돌아가는데, 길가에서라도 한번 뵙기를 감히 바라지 않을 수 없으나 또한 어찌 감히 반드시 (이첨지께서) 나오시겠습니까? 반고(槃皐, 반구대의 이전 이름)의 형승(形勝)을 매우 한 번 찾아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함께 온 사람들 가운데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잠시 머물러 지체되는 것은 개의치 않으나, 오히려 경유하는 거리가 멀고 치우쳐서 걱정이 됩니다’ 이처럼 한강 선생의 편지글에는 반고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유림의 주장처럼 반구대에 머물러 살고 싶다는 뜻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니, 이 역시 한강의 편지구절에 대해 과장되게 미화한 것으로 보인다. 오상욱 훈장은 이에 대해 “그동안 말로만 전하는 한강 정구의 편지를 발굴해서 지난날 반구서원의 건립내력을 재조명하고, 18세기 남립한 서원건립과정에서 지역유림의 역할과 천착에 대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경주 양동 문인들은 반구서원 들러 후손으로서 공경 다하고, 영남학파로서 도통연원 확인하는 계기 가져 반구대를 찾은 많은 문인들 가운데 경주양동문인 이덕현과 이덕표의 상량문 청탁으로 인해 반구서원 건립의도가 알려지고, 이후 많은 양동문인들이 반구대를 찾아 주변 경관과 산천의 모습에 매료되어 많은 시문을 문집에 남겼으며, 또 이들은 산수를 유람하는 목적 외에 조상숭배와 도통연원이라는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오상욱 훈장은 “서원 건립 후에는 경주뿐 아니라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특히 매호 손덕승의 반구서원 참배와 반구대 유람 이후 그의 벗과 제자들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이뤄진 학맥의 인물들 상당수가 반구대를 찾아 매호의 시에 차운(남의 시운(詩韻)을 써서 시를 지음) 하였고, 반구대 관련 시문을 남겼지요. 양동의 문인들은 반구대 일원을 둘러보면서 옛 선조의 자취를 뒤따르며 감회에 젖었고, 반구서원에 들러 후손으로서 공경을 다하고 영남학파로서 도통연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라고 했다. 오 훈장은 “반구서원 건립은 포은·회재·한강 선생을 언양의 중심인물로 격상시킨 것에 대해서는 의미가 없을 수는 없지만 반구서원과 집청정 건립이후 300년이 지난 지금도 반구대 일원이 명승지로 이름난 것처럼 삼현과 반구대 일원에 얽힌 사실을 밝힐 근거자료를 제시하고 명확히 한다면 반구대의 명성은 계속 더욱 투명하게 이어질 것입니다”라고 덧붙이면서 강조했다. 일부 사진 제공-김환대 경주문화해설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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