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의 성은 김씨(金氏)로서 이름은 원종(原宗)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에는 북송(北宋) 때의 백과사전과 비슷한 책인 『책부원귀』를 인용하여 법흥왕의 성을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고 하였지만 ‘모’를 성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울주 천전리 각석에 법흥왕을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한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성씨가 분명하지 않다.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서인 『북제서』에 ‘신라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공 신라왕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진흥왕의 성씨가 김 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법흥왕 대를 지나 진흥왕 이후 성씨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법흥왕은 지증왕의 맏아들로 신라 23대왕이며 재위기간은 27년간(514-540)이었다. 왕은 키가 7척이었으며 도량이 넓었다. 상대등을 설치해 귀족회의를 활성화하는 한편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 병부령을 설치하고 관등제와 골품제,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을 제정했다. 처음으로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 살생을 금하는 법을 만들었다. 지증왕 때 임금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지만 법흥왕 이후부터 정식으로 쓰이게 되었다. 한편 대외적인 면에서는 대가야와 혼인관계를 맺고 변방으로 진출하는 백제 군사를 견제했다. 또 이때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을 하였다. 구형왕은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이니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되는 인물을 받아들인 셈이 된다. 법흥왕 때 이루어진 치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의 공인이었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시대 구분을 상고기(박혁거세 - 22대 지증왕), 중고기(23대 법흥왕 - 28대 진덕왕), 하고기(29대 무열왕 - 56대 경순왕)로 구분한다. 여기에서 중고기의 시작을 법흥왕 시기로 잡은 것은 율령 반포 등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불교의 공인으로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이 다져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재위 27년 만에 왕이 죽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지금의 이 자리를 법흥왕릉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순환논리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논증의 결론 자체를 전제의 일부로 사용하는 오류를 말한다. “그 놈은 나쁜 놈이니 사형을 당해야 해. 사형을 당하는 걸 보면 나쁜 놈이야.” 바로 이게 순환논리의 전형적인 예다. 결론이 되어야 할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결론이 되풀이하여 전제가 되어 순환하게 된다. 이 오류를 가리켜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fallacy of begging the question)’ 또는 ‘부당 가정의 오류(fallacy of undue assumption)’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낸 것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는 왕의 능이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현 법흥왕릉의 남쪽에 효현동 삼층석탑을 애공사지로 보고 그 북쪽에 있는 이 고분을 법흥왕릉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법흥왕릉의 남쪽에 효현동 삼층석탑이 있으니 이를 애공사지 삼층석탑으로 추정한다. 전형적인 ‘순환논리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도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낸 것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진지왕의 능이 애공사 북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부근에는 이 능 외에 왕릉으로 추정할 만한 무덤이 없다. 따라서 법흥왕릉은 이곳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근직과 강인구 등은 무열왕릉의 위쪽 4기의 고분 가운데 한 기를 법흥왕릉으로 보고 있다.(2017.09.29. 경주신문 ‘80. 서악동 고분군은 누구의 무덤일까?<2>’ 참조)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조에서는 ‘冊府元龜 姓募 名泰’라 하여 이름을 ‘태(泰)’라 하였다. 같은 문헌 책부원귀를 인용하였는데도 『삼국유사』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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