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玉山書院)은 경주부의 최초 사액서원으로, 경주부에서 사액을 받은 곳은 1574년 옥산서원(회재 이언적)과 1623년 서악서원(설총·김유신·최치원) 그리고 1711년 숭렬사우(잠와 최진립) 등이다. 앞서 1572년 선조 때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재임1571.8~1574.2)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하고, 서악(西岳)의 향현사(鄕賢祠)에 있던 위패를 모셔왔다. 1574년 선조 7년에 ‘옥산(玉山)’이라 사액(賜額)받았는데, 자옥산(紫玉山)이 있어 ‘옥산’이라 이름하였다. 회재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시호는 문원(文元)이며, 자신의 호를 주희의 호 회암(晦庵)에서 가져올 정도로 주자학을 신봉한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1491년 경주부 양좌촌(良佐村)에서 태어나 1553년 유배지인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타계하였다. 어려서 외삼촌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께 수학하였으며, 우재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 송재(松齋) 손소(孫昭,1433~1484)의 둘째아들로 회재는 점필재학과 우재학을 전수받았고, 그의 사상은 훗날 안동의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의 중심선상에 있었다. 1610년 광해군 때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황과 함께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일찍이 1514년(중종 9) 문과에 과거급제 후 한성 판윤·이조 판서·예조 판서·형조 판서·의정부의 우참찬(右參贊)과 좌찬성(左贊成) 등의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40세 때는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이 되었으나, 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은 김안로(1481~1537)가 소인임을 내세워 홀로 반대하다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좌천되었으며, 얼마 못 가서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고향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세에 함양박씨 선무랑(宣務郞) 박숭부(朴崇阜)의 따님을 얻었으나 자식이 없었고, 25세에 석씨부인에게서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을 얻어, 현재 회재(晦齋) 18대 종손 이해철(李海轍,1949년생)씨가 독락당을 지키고 있다. 『회재집(晦齋集)』「연보·문원공회재선생연보(文元公晦齋先生年譜)」에, 1532년(중종 27) 선생 42세.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지었다. 바로 양좌동(良佐洞)에서 서쪽으로 20리 되는 곳으로, 선생 부친의 정자다. 선생이 젊어서부터 자옥산의 산과 골짝이 아름답고 시내와 못이 맑은 것을 사랑하였는데, 이때에 비로소 시냇가에 수십 칸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가난해서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오랜 뒤에야 완성하고, 독락당이라 하였다. 다섯 개의 탁영대(濯纓臺)·징심대(澄心臺)·관어대(觀魚臺)·영귀대(詠歸臺)·세심대(洗心臺)가 있다. 또 관어대 위에 작은 정자를 세웠으니, 첫째 칸이 정관재(靜觀齋)이고 둘째 칸이 계정(溪亭)이다. 정자 앞뒤에 소나무·대나무와 화훼를 더 심고 날마다 그 속에서 읊조리고 노닐고 낚시하면서 분잡한 세상일을 사절하고, 한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좌우의 도서를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사색하니, 고요한 가운데서 이룬 공부가 이전에 비해서 더욱 깊고 전일하였다. … 1572년(선조 5) 고을 사람들이 독락당(獨樂堂) 아래에 서원을 세웠다. … 이 산의 별업(別業)은 이전인이 지키고 있다.(築獨樂堂于紫玉山 卽良佐洞西二十里 蓋先生之考亭也 先生自少 愛其巖壑瑰奇 溪潭潔淸 至是始構堂溪上數十間 窮不能辦 久而後成 名曰獨樂堂 有五臺 曰濯纓.澄心.觀魚.詠歸.洗心 又立小亭于觀魚上 第一間曰靜觀齋 第二間曰溪亭 亭之前後 益樹以松竹花卉 日嘯詠遊釣於其間 謝絶世紛 端坐一室 左右圖書 靜中下工夫 比之前時 尤深且專 … 鄕人建書院于 獨樂堂下 … 此山別業 全仁守之)” 독락당은 부친 이번(李蕃,1463~1500)의 정자로, 경치가 수려한 시냇가에 세워졌다. 7세에 부친이 돌아가시고 40세 넘어서 비로소 독락당을 지었고, 깊은 산수관과 도학사상을 지닌 그는 독서와 사색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회재 사후에 퇴계 이황이 행장을 짓고, 선조가 즉위하자 왕명으로 선생이 남긴 글을 찾아 모으게 하고, 1572년 경주지역 사림들이 이언적을 기리기 위하여 경주 부윤과 경상 감사의 도움을 얻어 그가 머물던 독락당 아래에 옥산서원을 지었으며, 이후 조선의 많은 후학들이 참배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실제 서원의 주인 회재선생은 퇴계의 스승으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이후 퇴계의 후손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1768~1844)이 옥산을 찾아 참배하고, 계정 주위를 유람한 후 그 아름다움에 감복해 「옥산구곡」시를 지었다. 하계는 이 외에도 『하계집』권4,「퇴계구곡(退溪九曲)」,「도산구곡(陶山九曲)」,「원명구곡(原明九曲)」,「소백구곡(小白九曲)」등 5편의 구곡시를 창작한 구곡시의 대가로, 그가 후대에 와서 옥산구곡을 지은 이유가 무엇이며, 또 회재(晦齋)·퇴계(退溪)·한강(寒岡) 등의 유적지를 몸소 유람하고 구곡시를 남긴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 게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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