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경주’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문화유산은 무엇일까?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이나 유물들을 함께 보여주고 ‘경주’를 가장 잘 연상시키는 것을 고르라면 어떻게 될까? 수년 전 너무나 평범하여 생뚱맞지만 중요하기 그지없는 물음에 불국사, 석굴암, 고분, 금관, 성덕대왕신종, 다보탑 등을 제치고 첨성대가 선정되었다는 어느 설문조사 결과가 있었다. 아마도 엇비슷한 비교 대상이 없어 헷갈리지 않는 것으로 경주에만 있는 변별력 있는 것을 고른 까닭일까.
이 첨성대 일대는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났다. 경주 하면 떠오르는 첨성대가 보고 싶어서? 신라의 문화유산 가운데 첨성대가 가장 미적 감각이 있어서? 국보 중의 국보여서? 우스꽝스럽지만 주인공은 첨성대 뒤편에 심어 놓은 ‘핑크뮬리’ 때문이다. 최장 열흘에 이르렀던 지난 추석연휴에 경주를 찾은 관광객은 무려 8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 때 가장 핫한 이슈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 상위에 단골메뉴로 등장한 것이 ‘경주 첨성대 핑크뮬리’였으며, SNS에 ‘인증샷’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첨성대 모습을 배경으로 한 과거와 현재의 절묘한 궁합이었다.
어떤 이는 2시간 넘게 밀린 차량정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명한 산의 정상을 밟은 듯이 기뻐했는가 하면 오전 오후로 SNS에 현장 모습을 중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늦가을로 접어들어 핑크뮬리의 몽환적인 자분홍 색깔도 많이 바랬지만 아직 평일에도 20-30명이 항상 붐빈다.
핑크뮬리(Pink muhly)는 핑크(분홍)색 결실을 맺는 뮬리(뮬렌바르기아 카피라리스 ; Muhlenbergia Capillaris, 억새)의 줄임말로서 ‘분홍쥐꼬리새’ 또는 ‘분홍억새’를 말한다. 걸프쥐꼬리새(Gulf muhley)라고도 불리는 뮬렌바르기아 카피라리스는 벼목, 벼과인 억새의 한 종류로 라틴어로 ‘모발 같은’ 뜻을 가졌으며, 원산지는 미국 동남부인 플로리다 주, 동부 텍사스, 뉴저지, 인디애나 주, 켄터키 주 등지이다. 5월에 싹이 나서 여름 내내 초록색을 띠다가 9월-10월에 파스텔톤의 연한 자분홍색으로 물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핑크뮬리는 질병에 내성이 있고 건조한 가뭄에도 잘 견디며, 그늘에도 자라는 다년생식물이면서 유지 관리비가 적게 들어 최근에 와서 훌륭한 정원 식물로 인기가 높다.
몇 해 전 경주 북군동에서 보문관광단지 입구로 들어서는 왼편에 자그맣게 조성되어 호기심을 자아내던 핑크뮬리는 단지 내 여러 곳으로 확대되었고 급기야 첨성대 일원에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는 올해 초에 경주시의 사적공원을 관리하던 책임자가 과감하게 결단하여 심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객들이 열광하는 것으로 유적지에까지 오게 하자” 이 아이디어가 그야말로 대박을 친 것이다. 입동 절기가 지난 아직까지도 핑크뮬리를 검색하면 경주의 첨성대가 제일 먼저 띄워진다. 이 일대는 그동안 봄에 유채꽃을 시작으로 여름과 가을까지 꽃을 피우느라 갈아엎고 심기를 반복하여 해당화며 코스모스, 황화코스모스, 목화 등을 심어왔다. 핑크뮬리 밭은 3천㎡ 내외의 넓지도 않은 면적에 모종 값으로 1500만 원을 투자한 것으로 경제적 수익효과는 수억 원에 다다른다.
일부에서는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에 외래종 화초를 심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사실 그동안 경주에서는 주요 관광지에 심어진 일본향나무를 비롯해 히말라야시다, 플라타너스 같은 수종을 외래종이라 해서 제거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꽃식물에까지 외래종을 배제한다면 팬지, 샐비어, 코스모스, 장미 같은 꽃들은 구경도 못 할 것 같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 제일 먼저 고려해야하는 것이 고객맞춤이다. 바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 기업이 산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주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을 든든한 밑천으로 삼아 관광객이 요구하는 트렌드에 맞춰야만 한다. 유적과 주변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들 좋아라 하는 것으로 채워 나간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첨성대 핑크뮬리를 통해서 배웠다. 이것이 바로 관광수요층과의 소통이 아니겠는가.
전주의 한옥마을에 견주어 꾸미고 있는 황남동 한옥마을, 여기서 나아가 서울의 경리단길에서 힌트를 얻어 이름 붙인 황리단길은 벌써부터 고유명사화 되어가고 있다.
이곳에서 외래식품인 핫도그며, 빵, 돈가스, 커피,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자. 떠밀려 지날 만큼의 인파에 1시간 이상 줄서서 먹고 가면서 인증샷에 찬사를 남기는 관광객은 다 떨어져 나갈 것이다. 외래 화초 기피는 한국 사람이기에 한옥에서 살고 한복만 입고서는 우리 고유의 식재료로 전통음식만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다. 아찔한 일이다.
전국의 각 도시들은 저마다 자기 지역만의 색깔을 조금이라도 더 뽐내기에 여념이 없고 역사적 실증이 뒷받침되지 않은 것까지 축제로 만들어 요란을 떤다. 이러한 현상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전략이 아닐까. 전라남도 함평군은 지리적 접근성이나 면적, 인구수에 아랑곳하지 않고 1999년부터 나비대축제를 열어 국민적 찬사를 받고 자연생태공원을 만들어 국화축제까지 이어가고 있다. 한 술 더 떠서 주포한옥마을에는 억새벨리존을 만들어 핑크뮬리로 꾸미고 있다니 발상의 전환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주도 과거와 문화유산의 멍에에 짓눌려 있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고객이라 할 수 있는 관광객이 원하는 경향을 재빨리 파악하고 새로운 트렌드에 발맞춰 나갈 때 스스로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거듭날 것이다.
외래종이지만 자아내는 분위기가 외래종 같지 않은 분홍억새(핑크뮬리)와 고색창연한 첨성대의 조화! 이러한 궁합을 내년에는 경주의 여러 군데서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