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한 그루
-안도현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 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에게 들켜버린 연모(戀慕)의 정(情)
배추가 속을 채워가는 이맘때쯤이면 나뭇잎이 빨갛고 노랗고 갈색으로 변하는 ‘단풍(丹楓) 현상’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붉게 물드는 잎을 가진 나무가 이름 그대로 ‘단풍나무’다. 매끈한 팔다리와 큰 키를 가진 이 나무가 타는 듯이 물드는 이유는 나뭇잎 속 색소 때문이란다. 온도가 떨어지고 수분이 부족해지면 카로티노이드나 안토시아닌이 많이 나와 그렇게 된다고 한다.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붉다”(霜葉紅於二月花). 두목(杜牧)이 「山行」이라는 시에서 쓴 이래로 단풍은 많은 시인들의 다양하고도 굴곡 많은 삶의 소재가 되었다.
여기 그 중 한 편을 소개한다. “가을 날 후미진 골짜기마다 살 타는 냄새 맑게 풀어놓고/서러운 뼈만 남고 싶은가”(「단풍나무」)고 노래했던 안도현은 단풍을 “빨갛게 달아오르는 마음”으로 비유한다. 이 시 역시 그런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너 보고 싶은 마음”의 불이 얼마나 타올랐으면 그 불을 끄려고 가을산 중턱에서 몸으로 찬비를, 그 빗소리를 받고 서 있을 정도였을까? 그러나 속수무책 찬비를 맞는다고 그 불이 쉽사리 꺼질 것인가?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할 정도로 내 마음은 간신히 평형을 유지할 정도인 것을. 선덕여왕을 흠모하던 지귀의 가슴이 저러했을 것이다.
이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대신 벌겋게 달아오른 몸이 단풍나무다. 단풍나무 혼자서 “이것 봐, 이것 봐”하면서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거다. 단풍나무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저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저 표정은 너에게 달려가라는 말인가. 그냥 있으라는 몸짓인가.
큰일 났다! 그리움이란 사랑이란 기어이 들켜버리고 마는 것인가. 멀리 있는 애인이 그리울 땐 기차도 “몸살인 듯/시방 한창 열이 오르고”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픈 것”(박재삼, 「무제」)인가.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이런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서정주, 「푸르른 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김명인, 「너와집 한 채」)는 산행길에서 내 가슴에도 가속으로 올라오는 그리움을 어쩌지 못해 넋을 잃는 때가 많아진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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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