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사회문화예술계 각 장르에서 최고 전문가를 발굴해 그들의 스토리를 심층 인터뷰한다. 어떤 직업군이든 그 직업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고수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이번 첫 회에서는 동국대 미술학과 교수 김호연 화백을 소개한다. 지난 3일, 늦가을의 정취가 무르익어가는 현곡면의 작업실에서 김호연 화백(62·인물사진, 동국대 미술학과 교수)을 만났다. 그의 고색 짙은 율동 자택에서 달 밝은 날, 술 한잔을 기울이며 만난 지 열흘만이었다. 중후한 화가의 외모는 이미 작품과 함께 자자한데, 작품의 산실인 작업실에서 만나니 멋짐이 더욱 배가됐다. 그간 숱한 역작을 탄생시킨 작업실에는 작품 속 무녀들의 눈빛이 서늘했고‘바리공주(바리공주는 망자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중계자로 인간과 신의 다리 역할을 한다는 바리설화의 주인공)’와 십장생, 달마가 넘실대고 있었다. 김 화백만큼 세월의 더께도 함께였다.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김 화백은 자신의 삶에서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는 한국적 프라이드를 견지한 채, 샤머니즘 속에 신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을 표현하고 그 답을 찾아가고 있다. 단청을 연상케 하는 원색적 화폭에는 한국적인 한과 애잔함이 공존하고 현세와 내세가 어우러진다. 그는 또, 경주의 역사와 문화재, 수많은 설화들과 경주의 사소한 일상 속 사람들의 모습까지 아끼고 작품으로 승화하고 있다. 김 화백은 30여 년간 경주에서 작업하면서 번뇌하고, 술 마시고, 수행하고, 기뻐했다. 수직적 논리가 아닌 수평적 논리로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동반했던 김호연 화백은 그림의‘고수’다. 김 화백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작품세계는 어떤 화가보다 강렬하고 그 색채가 분명하다. 그의 그림들과 삶의 여정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았다. -최근, 십장생 기본적으로 작업하면서 원방각(圓方角)과 풀어진 누드를 소재로 넣으며 함께 작업 경주시 율동 벽도산 자락 언덕배기에 음전한 기와 두채가 ‘ㄱ’자로 날아갈 듯 멋지게 배치돼 있는 집이 김호연 화백의 ‘벽도산방’이다. 포항시 청하면에 있던 120년 된 고택 두 채를 해체해 경주로 이건해 와서 지은 집에서 2년째 살면서 20년 넘도록 작업해 온 현곡면 가정리에 있는 작업장을 오가며 작품에 전념하고 있다. “요사이는 주로 십장생을 기본적으로 작업하면서 원방각(圓方角, ‘하늘의 이치를 알아 땅에 펼치다’라는 의미로 천지인을 상징한다고 함)과 다소 풀어진 누드를 소재로 넣으며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내년쯤 전시를 한 번 하겠지요. 향가 25수의 설화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학생들과 함께 해 전시할 예정이기도 하고요” 향가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서도 향가를 소재로 전시한 바 있다. 그는 현재까지 50회를 넘는 개인전(뉴욕 11회, LA 4회, 독일, 일본, 중국 등)을 여는 등 세계 곳곳에서 작품전을 통해 한국을 호흡케하는 세계적 시각을 가진 작가로,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신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 현장 아니면 만날 수 없던 젖은 눈을 찾아 수많은 굿판 찾아다녀 “1980년 중반부터 작업의 소재로 다루어 온 샤머니즘은 신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 생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굿판에서 이어지는 신과의 소통을 통해 보여주는 무녀의 애증과 그 허공에 머문 처연한 눈빛은 어떤 모델을 써서도 표현될 수 없는 애절함의 극치였지요. 현장이 아니면 만날 수 없던 그 젖은 눈을 찾아 수많은 굿판을 찾아가 그들과 이야기하고 스케치하며 뛰어다녔죠. 그렇게 ‘굿을 하는 무녀’ 시리즈가 탄생했습니다” 십장생, 바리공주, 달마가 등장하는 김호연 화백의 작품세계는 한국적이면서도 무속적이다. 한국 무속 신화속 원초적 현실에서부터 자연의 환희까지 담아내는 그는 늘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작품 세계를 선보여왔다. 인간과 식물, 동물, 해와 달의 형상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화면은, 무속 의식에 의해 생긴 에너지의 반영인 생명력을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한편, 우리나라 샤머니즘은 바리공주를 무조(巫祖)로 삼고 있는데 김 화백은 거대한 화면에 ‘바리공주의 설화’를 평면화 시키면서 초현실주의적으로 표현해나가고 있다. -뉴욕? 뉴욕!! 절정의 인기 구가하던 시기에 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뉴욕행 결행, 작업의 다양성 도입 “그때 안가면 못갈 거 같았죠. 1991~1994년까지 뉴욕 주립대(Stony Brook) 한국학과 기금모금전에 초빙돼 초빙교수로 1년을 예정하고 갔죠. 그런데 점차 그림 자체에 대한 시야가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30대 초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한 샤먼(무당)의 눈빛을 유화로만 그리던 저였습니다. 접신의 경지에서만 보이는 무당의 눈을 그려 국전에도 몇 번 수상했던 당시였고요. 그런 상황에서 뉴욕을 갔는데, 1년여 지나면서 언더그라운드, 오픈스튜디오 작가들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작업의 다양성에 눈을 뜬 겁니다” 그때 그가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유화를 버리는 것이라 판단했다. ‘서양화는 바로 유화’라는 등식으로만 알았던 터였다. 1991년 뉴욕으로 출국하기 직전에 그의 전시는 대성공이었을 정도로 인기였다. ‘잘 팔리는’ 화가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주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뉴욕행을 결행했고 4년을 머물면서 작품세계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1993년 당시, 바리공주 시리즈로 수십 편의 대작을 그렸는데 ‘황천무가’를 풀어내려간 벽화 연작들로서, 가장 긴 그림은 30m 작업이었다. 뉴욕 Emerging Collector 갤러리를 완전히 감싸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바닥까지 채우는. 재료는 황토, 적토, 흑토 등을 사용해 종이 또는 아크릴 바탕으로 올린 캔버스에 못으로 긁어 형태를 나타내는 모노톤의 작업으로 한 번 작업에 몰입하면 2~3일은 쉬지도 않고 작업할 만큼 신명난 작업이었다고 김 작가는 당시를 회고했다. 이 작업으로 작업의 구도나 구상이 바뀌면서 유화에 대한 매력은 점차 잊혀져갔다. 한지와 먹을 자주 쓰고 원색과 단청 안료를 즐겨 쓰게 된 것이다. 김 화백은 뉴욕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할 즈음에는 경제적으론 몹시 힘들었지만 동국대 미술대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전시 섭외는 쇄도했다고 한다. 홍콩,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10회 이상 할 정도였다고. 미국서 귀국 후 원효예술제, 양동마을, 월포바다예술제, 공장예술제(빈 공장 부지를 활용하는 작업 처음 시도) 등을 총괄 기획하기도 했는데 이는 뉴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동학예술제의 경우는 2002년부터 14년간 기획했으며 기록화 200호짜리 80여 점을 작업했다. 그의 말처럼 동학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뤘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부스전시, 공장전시 도입하고 적용해 학생들에게 자신감 심어줘 “공장 작업을 제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학생들이 어디서든 기획 할 수 있고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됐지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부스전시, 공장전시를 도입하고 적용한 것입니다” 귀국후 얼마되지 않아 1997년 제자들과 함께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시도한 것이 ‘공장 작업’이었다. 40대 초반이었던 김 화백은 공장 작업과 함께 작가를 선정해 지원한 선재미술관 초대전에도 참여했으며 동학 작업과 엑스포 작업이 겹치면서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특히, 공장 작업은 고생을 워낙 많이 해 기억에 남는다고. 학생들 각각 개인 부스를 만들어 작품도 많아지고 개인마다 설치작업, 벽화 작업 등을 했다. 그는 동학 작업을 앞두고는 학생들을 자비로 성지 순례를 경험시켰다. “경주에서 비중도 있고 명분도 있는 동학 관련 작업을 제자들과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동학 기록화 작업을 할때였죠. 몸살을 심하게 앓던 차에, 파노라마처럼 검무(劍舞)하는 장엄한 장면을 생생하게 현시하고서 그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까지의 여러 상황의 변화에도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근간은 무엇? “역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겠지요. 제게는 그림 자체가 생활입니다. 뉴욕을 다녀 온 뒤부터 방학때만이라도 항상 미술 선진지에 다녀왔습니다(좋은 컨디션이 아니어도). 그것은 경주라는 정체된 울타리를 벗어나 뉴욕이라도 가면 정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니까요. 제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안일했던 일상적 한계를 떨쳐내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의 통풍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번거롭고 힘들 수도 있는 자극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죠. 여러 예술제를 기획한 것들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경주는 제 그림을 만드는 고향이고 원천입니다. 그런 경주에서 요사이는 외부인들과의 교류를 최대한 줄이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통한 소통이 고팠던 차제였다. 김 화백을 만나면서 그러한 문화적 성취와 담론을 펼수 있어서 좋았다. 전통의 어디쯤에 컨템퍼러리(contemporary)한 면모와 경계를 넘나드는 그를 보면서 색채 짙은 ‘풍류’를 공감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 수 년을 보냈음에도 강렬한 한국적 감각을 가진 김 화백은 그가 지향하는 지점에 대해 연신 골몰하고 도전하고 있었다. 더욱 풍성하게 경지를 넓혀 갈 그의 작품을 기대하면서 그가 멋진 선순환을 이뤄내길 바래본다. 김호연 화백은 개인전 58회(뉴욕11회, L.A 4회, 독일, 일본, 중국, 서울 등), 뉴욕 주립대(Stony Brook) 초청교수, 선재 미술관 초대전(1997), 백남준 추모전, 스페이스 월드 갤러리(뉴욕, 2006) 등 단체전 다수를 가졌다. 뉴욕 주립대 중앙도서관 벽화 ‘굿’ 800x300cm 제작, 전남대학교 벽화 ‘황천무가’400x300cm 제작, 동국대학교 벽화 ‘대왕암’500x200cm 등을 제작했으며 동학예술제 총기획 및 기록화, 영정제작.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등에 기획 및 전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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