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악서원은 경주의 서악동에 위치한 사액서원으로 김유신(金庾信)·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지역 내 명성이 대단하다.
건립내력을 살펴보면, 1561년(명종16) 경주부윤 이정(李楨,1512~1571)은 지역유림의 공조로 김유신의 위패를 모셨고, 1563년에는 신라의 문장가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를 차례로 추가 배향하였다. 이때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친필 현판을 써주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33) 부윤 이시발(李時發,1569~1626)은 서원 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1602년 부윤 이시언(李時彦,1535~1628)은 사당을 중건하고, 1610년(광해2) 부윤 최기(崔沂,1553~1616)는 강당과 동재(진수재). 서재(성경재). 전사청(典祀廳). 장서실(藏書室)을 건립하였다.
1623년(인조1) 부윤 여우길(呂祐吉,1567~1632)은 지역유림 진사 최동언 등과 사액을 요청해 ‘서악(西岳)’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사액서원 이후 1646년(인조24) 부윤 이민환(李民寏,1573~1649)은 추가로 영귀루를 중건하는 등 서원의 창건과 중건 그리고 부속건물 건립에 경주부윤과 지역유림의 공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하는 말에 어느 서생이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며 김유신의 위패를 빼고 조정의 사액을 요청하자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얼마 뒤 서생은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서생은 자신이 한 일을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 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죽었다고 전한다.
또 경주출신의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는 서악지(西岳誌)에서 “동국에서 태어나 그 문장과 사업으로 중원에까지 명성을 날려 후세에 찬란하게 빛나는 이는 천고에 한 사람일 뿐이니, 이런 분[최치원]은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해야만 할 것이다. 청송황엽(靑松黃葉)의 구절을 가지고 은밀히 고려의 왕업을 도왔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의 식견이 좁아서 그렇게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 기미를 보고는 멀리 떠나 끝내 숨어 살면서 고려 시대에 자취를 더럽히지 않았으니, 홀로 우뚝 서서 세파에 휩쓸리지 않은 그 고결한 지조는 또 백세의 사표가 된다고 할 것이다(生乎東國而其文章事業, 至於驅駕中原, 暎曜後世者, 千古一人而已, 此其可以從祀聖廟也. 以靑松黃葉之句, 爲密贊麗業, 則必史傳之陋耳. 見幾高蹈, 終於隱晦, 迹不染麗代之世, 其特立獨行之義, 又可謂百世之師.)”며 신라학자 최치원의 당위성에 대해 말한다.
김유신 배향이 못마땅하다고 주장한 서생과 정극후의 최치원 배향 주장은 상반되는 입장으로 당시 서악서원 배향자 선정에 있어 유림 간 마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사례다. 『서악지』를 편찬한 정극후는 선우협·조임도 등과 여헌 장현광학파의 인물이면서 기호학파 근기남인 그리고 퇴계학의 인물로 영남남인의 학맥을 갖는 인물이다. 그가 서악지에서 최치원의 신라인물 주장과 서악서원의 상세사항을 기록한 것은 지역 내 경주최씨 유림과 연관성이 깊다고 본다.
1572년(선조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역유림의 공조로 옥산서원을 창건해 1574년 사액 받는다. 이는 명실상부한 경주의 자랑이자 유림의 사표가 되었으니, 회재 이언적과 그의 스승 우재 손중돈 그리고 회재와 퇴계의 사승관계 등 경주의 학문이 안동의 퇴계와 결합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당시 부윤 이정의 협조로 김유신과 최치원 등을 모신 서원을 건립해 신라의 후예임을 강조하고 지역의 입지를 강화하였고, 이런 바람이 서원건립과 사액까지 이어지면서 지역 내 유림세력은 확대되어 간다. 이는 단순 사림의 기반을 다지는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부윤 여우길은 소론계 인물이지만 그의 아들 여이량(呂爾亮,1603~1669)의 묘갈첩을 송시열이 적은 바가 있다.
우암 집권 당시에 소론과 노론이 극렬히 다투지만 결국 1694년 갑술환국으로 대부분의 남인이 몰락하고, 이후 노론 전제정치가 이뤄지면서 남인과 노론의 불편한 관계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놀라운 사실은 1719년 경주부 남산자락에 노론계 서원인 인산서원을 지을 때 포항에서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모셔다 서악서원에 잠시 봉안한 일이 있었다. 당시 남인과 노론의 다툼이 심화되어 예민한 상황에 골수 남인의 땅에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의 영정이 지역 내에 들어온 사실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서악서원은 노론계와 기호학파 근기남인의 세력이 미치는 공간이었고, 당시 부윤으로 온 자들 역시 노론계 인사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전역에 지역유림간의 마찰인 향전(鄕戰)이 자주 일어나 영남지역에 노론계 서원은 대부분 사라지고 흔적조차도 찾기 어렵게 되지만, 지금도 건재한 서악서원은 지역유림의 강력한 결합과 시류에 협조하며 위기를 모면하였으니, 필자는 서악서원을 사림이 세운 서인계 서원으로 본다. 또한 이에 협조한 여러 경주부윤의 협조와 조선의 양반유풍을 중요시하는 경주에서는 조선유학자가 배향되지 않은 것은 좀 이례적인 경우지만, 앞으로 서악서원의 내력과 관여한 인물에 대한 연구가 심도있게 이뤄진다면 더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리라 판단된다. 즉 서악서원은 권력의 풍파와 세월의 시련을 견뎌낸 우여곡절 많은 사액서원 가운데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