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무 발상지는 울산이지만 처용무가 추어진 곳은 신라 헌강왕 이래 경주입니다. 실제로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서 처용무를 추었던 것이므로 경주의 중요한 무형문화유산입니다. 경주에 무형문화유산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처용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용목 신라처용무보존회장(55, 신라가면무연구소장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이수자)은 유형의 문화재 관리에만 치중하던 시절은 지났다고 강조했다.‘최고의 보존은 활용’이라는 맥락에서 경주에 와야만 볼 수 있는 공연이 없다는 측면에서 처용무부터 재창조해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설명했다. 그는 한강 이남에서 처용무를 가장 먼저 시작한 이로, 심소 김천흥 선생에게 사사받고 지금에 이르렀다. 김용목 회장은 경주의 중요한 무형문화유산이자 신라시대 콘텐츠를 공연화 하자는 것으로 처용무 재현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지난 16일 오릉 가까이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는 그를 만나 처용무의 기원과 유래, 경주에서 처용무가 추어져야 하는 당위성 등에 대해 들어 보았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처용무는 이미 춤의 역사와 정통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때 처용이 추었던 춤을 후세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본 따 탈을 만들어 쓰고 춤을 추면서 1000년을 넘게 전해져 내려왔다.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역신이 사랑해 범하려 하자 처용이 노래 부르며 춤 추었더니 역신이 무릎꿇고 빌어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에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인 처용가 관련설화와 더불어 원문이 실려 있다. 처용설화를 살펴보면,‘879년(헌강왕 5년)에 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산)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면서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졌다. 갑작스런 변괴에 일관이 말하되˝동해 용의 짓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고 해서 왕이 용을 위하여 절을 짓도록 명한 즉, 바로 어두운 구름은 걷히고 이로부터 이곳을 개운포(開雲浦)라 했다. 동해 용 일곱 아들 중 하나가 왕을 따라오니, 곧 그가 처용이었다. 처용은 달밤이면 거리에 나와 가무를 하였고 왕은 그를 미녀와 짝지어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이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역신(疫神)이 사랑해 범하려 하자 처용이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더니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무릎꿇고 빌었다. 그 후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을 그려 문간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가 나게 했다. 이 때 처용이 춘 춤이 악부(樂府)에 처용무(處容舞)라 전해지고 있다. ‘처용무’는 고려·조선 시대의 궁중 나례((儺禮,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로 춤추는 사람 다섯 명이 처용 가면을 쓰고 오방(五方,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한 오색(청,홍,황,흑,백)의상을 입은 5인이 추는 전형적인 의식무용이다. 김 회장은 “처용문화는 매우 오래 지속돼 왔으며 처용 관련 논문이 400편이 넘으며 과연‘처용학’이라 할 정도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처용의 정체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샤먼, 즉 무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을 쫓기 위한 굿에서의 무당, 주로 잔치나 음악속에서 제사를 지내고 담당하는 장이었을 것으로 저는 추정합니다. 사람들이 처용의 그림을 그려서 문에 붙이거나 처용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기에 샤먼이자 치유자로 보는 것이죠”라고 했다. -처용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처용의 형상을 본떠 만든‘처용탈’ 김용목 회장은 “결국 처용무의 특징은 처용탈을 쓰는 것입니다. 제가 처용탈을 만든지 20년이 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처용탈이 최초의 그림으로 등장하는 것은 악학궤범(樂學軌範)이라고 설명했다. 1493년(성종24년)에 발간된 악학궤범에는 처용복식의 색깔과 치수 그리고 처용의 생김새를 그린 그림과 만드는 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한 처용은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제현의 익제난고(益齋亂稿)의 시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후, 조선조 많은 학자들의 시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며, 고려가요 처용가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묘사돼 전해진다. 조선 후기의 의궤나 도병, 화첩에는 많은 처용의 그림이 전하고 있는데 같은 모습을 한 처용이 하나도 없다. -‘처용탈’은 연산 10년(1504년), 연산의 처용무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급격하게 변화 김 회장은 중앙대 문화재학과 박사 논문‘처용탈 변화요인 고찰’에서‘처용무를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처용탈이다. 아무리 처용무의 춤사위를 구사하고 처용의상을 입고 춤을 추어도 처용탈을 쓰지 않으면 처용무라 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면서‘악학궤범 권9 처용관복도설에는 처용의 형상과 처용복식이 치수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처용탈과 복식을 제작 할 때 전범으로 삼고 제작에 임해왔다. 그러나 처용무는 조선 개국부터 1442년 나례 때(세종 24년)까지 여기(女妓)들이 추었고, 세종 25년(1443년)부터 연산 10년(1504년)까지 61년간은 남자 재인들이 춘 것으로 확인된다. 1504년부터는 다시 여자들이 처용무를 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연산은 1504년(연산 10년) 처용무를 기녀들에게 가르치고 연향 때 사용하도록 하게 한다. 한편,‘1504년을 기점으로 처용탈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처용무가 가장 많이 기록되어있는 실록은 연산군일기로 연산의 처용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처용탈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처용탈은 여기들이 쓰기에 맞도록 가볍고 작은 형태(경편(輕便))하게 만들어졌으며 모양 또한 변화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여자들이 춰서 춤의 변화도 있었다. 이 전통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또,‘조선후기의 처용탈은 모두 얼굴이 길고, 특히 평양감사환영도의 부벽루연회도 속 처용탈은 수염이 없다. 평양의 기녀들이 추었기 때문이다. 그 외 전해지는 도병과 계첩의 처용탈은 한결같이 턱이 길게 강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의 처용탈들은 악학궤범을 본보기로 삼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되어 왔음을 확인 할 수 있다’면서‘현재까지 조선시대에 처용무가 그림으로 전하는 것은 헌종무신진찬 도병의 처용무 그림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처용무는 경주와 안동의 기녀들이 찰 추니까 불러 올려라’ 그는 “실제로 처용무가 행해진 장소로 신라‘월명항’을 비정하고 있습니다. 처용이 급간(신라 17등급중 9등급)이라는 벼슬을 하면서 신라 왕경에서 살았고 설화 속 역신 사건이 결국 왕경에서 일어난 사건이지요. 처용이 달 밝은 밤에 춤을 추었던 곳은 바로 금성 남쪽(‘금성’자체에 대한 장소 비정 논란이 많지만)이라고 하는데 있어, 설화가 탄생한 곳으로 신라 왕경쪽을 추정하고 있으며 이는 저잣거리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죠”라고 했다. 한편, 궁중에서 가장 큰 행사에는 처용무가 반드시 추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처용무를 잘 추는 이들에겐 상을 주고 잘 추지 못하는 이들에겐 벌을 내리기도 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큰 잔치를 준비하는 선상기(選上妓, 조선후기 지방관아의 향기 중에 뽑혀서 상경한 기생) 기록에는‘처용무는 경주와 안동의 기녀들이 찰 추니까 불러 올려라’는 기록이 전하며 경주 세 명, 안동 세 명의 이름까지 적혀있다고 한다. -악학궤범의 처용탈과 함께 조선 후기 처용탈의 해학적인 모습도 수용해 처용무 표현 지평 넓혀야 상기한 논문에서는‘이후, 처용무는 1922년(순종 16년, 일제강점기)까지 60여 년이상 단절되었다고 보고 있다. 1923년 순종탄신오순연때 창덕궁에서 김영제, 함화진, 이수경의 지도로 66년만에 처용무가 다시 추어졌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처용탈은 조선시대 처용탈의 전승계보를 이탈한 것으로, 이왕직아악부의 함화진, 김영제, 이수경은 실제 처용무를 춘 적이 없으며 복식과 처용탈 또한 남아있지 않아 새로 제작 했다. 제작할 사람이 없어 일본 사람이 와서 처용탈을 제작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현재의 처용탈들은 조선 후기에 일관되게 이어져 오던 처용탈의 특징인 얼굴이 길고 턱이 유난히 긴 처용탈의 맥을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후기에 변화 발전해 오던 처용탈이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1493년 당시의 악학궤범 처용형상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지요”, “그 사이 500년간의 처용무 변천사는 사라지고 다시 악학궤범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시 탈이 커지고, 그간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것이 다시 처용무가 된 것이지요. 이는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는 원형과 전형의 논란에 하나의 사례로 회자될 만하다고 봅니다. 처용탈도 악학궤범의 처용탈과 함께 조선 후기 처용탈의 해학적인 모습도 수용해 처용무 표현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경주에서 처용무가 제대로 알려져야 하는 것은? “처용무의 발상지는 울산이라고 하지만 처용무를 춘 곳은 신라 왕경입니다. 처용이 춤을 췄다는‘월명항’이라는 거리도 기록에 있어서 그 장소만 비정되면 처용무를 계속 선보이려고 합니다. 시간과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수시로 자연스럽게 추려는 것이지요” “처용무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역사성이나 기록들이 매우 많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도 큽니다. 신라때부터 남아있는 춤은 처용무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에선 소중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돼 있는 처용무인데, 공식적으로는 올해 한 번도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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