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 미학의 본질(2)-구심적 응축과 원심적 확산
여기서는 구림 시의 시공간 전개와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공간적으로 볼 때 구림의 시들은 경주시편과 기행시편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구림은 등단작인 「모량부의 여울」연작에서부터 경주와 그 인근을 노래한 시들을 일생에 걸쳐 창작하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내외를 아우르는 기행시편도 많이 남기고 있다. 이는 ‘-에서’라는 제목을 가진 시들이 50편을 넘는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고향을 다룬 시에서 자연은 대체로 신라를, 가족사를, 마을 공동체를 지향한다. 신라시편만 확인해 본다.
신라의 얼을 담은
돌돌돌 움켜잡고 싶은
물밑 자갈돌
-「모량부의 여울(1)」
전신에 감긴 세월을 풀어내면
그 속에 남아 있는
기왓장만한 푸른 하늘
그 바다를 날아오르고 싶다
-「雁鴨池 遺物-鴟尾1」
등단작부터 구림은 경주의 자연에서 신라를 발견한다. 이는 제목에 ‘모량부’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에게 현실과 신라는 구분되지 아니한다. 그는 “금척리 고분 비탈에 하얀 머리털의 처량한 억새”를 “하늬바람에 전신을 흔들며 출렁이는 신라 사람들”「고분공원에서-逍遙漫筆3」로 읽고, “여울을 건너면(서)/신라여인의/맑은 음성을”「모량부의 여울(3)」 들었다. 자연을 다룬 구림의 시들은 신라라는 시원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그에게 도달해야 할 핵심적 지향, ‘구심적 응축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구림 시학의 원심적 확산’이라 명명할 수 있는 기행시편의 행선지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다. 秋史, 윤봉길, 윤동주 같은 역사 속 인물을 불러내기도 하고, 청마, 한흑구 등 함께 교류했던 그리운 이름들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들을 불러내는 방식은 ‘부재중’ 혹은 ‘외출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아직도 그 정신의 실체를 인정하는 기법이다.
靑馬는 외출 중
카랑카랑한 음성 너털웃음소리만
방안 가득 떠돌고 있었다.
-「청마고택에서」
중국과 만주, 백두산, 일본 시편들이 그의 국외 기행시편인데, 거기서도 그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민족 혹은 뿌리 찾기라는 화두에 초점을 맞춘다. 심양공항의 민들레꽃에서 그는 “이국 땅에 뿌리내린 조선족들”의 모습을 발견하며, 집안 구릉의 고분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일본 비와코 호반의 제비꽃에서 “서라벌 여인의 고운 얼굴이/걸어 나”오는 것을 본다. 어느 곳의 자연도 결국 구림에게는 우리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결국 경주시편과 국내외 기행시편이 구심적 응축과 원심적 확산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이 모두가 ‘뿌리 찾기’라는 주제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리와 달관의 경지
만년의 구림은 순리와 달관의 세계를 노래했다. 「노자의 물」연작은 이를 잘 보여준다.
발끝이 닿는 곳마다
꽃봉이 맺고
마른 가지에 잎이 핀다.
낮은 곳으로
가장 비천한 곳으로
가는 걸음
닿는 자리마다
환히 눈을 뜨는 들판과 숲.
-「노자의 물 · 2 」
물은 흐르면서 땅으로 스며든다. 이 자연스러운 잠적은 그러나 완전한 사라짐이 아니다. 꽃봉과 잎 속에서, 들판과 숲에서 다른 몸으로 살고 있다. “바위 끝 벼랑에 어슬렁거리며” “목청을 가다듬고 있”기도 하다. 이 전신(轉身)과 순리는 구림 미학이 가닿은 지점이다.
자아와 세계의 경계가 허물고 분별이 없는 구조를 지향하면서 독특한 미학을 열었고, 우리의 뿌리를 향하여 줄기차게 매진했던 구림은 순리와 달관의 세계를 거쳐 자연으로 돌아갔다. 구림은 갔지만 그가 남긴 문학의 울림과 그윽하고 따뜻했던 시선은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