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은 서리가 내린다는 절기 상강(霜降)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고 높은 산에는 벌써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
지금은 기계화로 농촌도 크게 달라졌지만 이런 속담이 전해질 만큼 가을걷이를 할 이맘때가 되면 부지깽이도 덤벼야 하고 존귀하신 마님까지 나서야 할 만큼 바빴다. 필자는 퇴임 후 160평 남짓한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마늘을 심고 나니 할일이 별로 없다.
문득 이율곡 선생의 한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平生畏長夏(평생외장하) 평생 긴 여름이 두려워
一念願淸秋(일념원청추) 일념으로 청명한 가을을 기다렸는데
如何遇秋至(여하우추지) 막상 가을이 되니
不喜却成愁(불희각성수) 기쁨보다는 수심이 생긴다.
‘남비추여희춘(男悲秋女喜春)’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는 가을을 슬퍼하고 여자는 봄을 기뻐한다는 것이니 남성은 가을, 여성은 봄에 감수성이 예민해진다는 의미이다. 공연히 울적한 기분이 든다. 율곡의 시를 읊조려보지만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기분 전환을 하고자 집을 나와 서악으로 김양묘를 찾아 발길을 옮겨 본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69명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는데 김양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증조부가 이찬 김주원(金周元)이다. 선덕왕이 죽자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기로 되었으나 북천 물이 불어 이를 건너지 못해 대신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원성왕이다. 이후 주원은 명주(현 강릉)로 물러나 살았다. 다행히 이후 그 집안은 건재해 대대로 요직을 차지하였다. 조부는 소판, 아버지는 파진찬 벼슬을 하였다.
제42대 흥덕왕이 후사 없이 돌아가시자 왕의 사촌아우 균정과 그의 형 헌정의 아들 제륭이 왕위를 다툴 때 김양은 균정의 편을 들어 제륭과 싸우다가 제륭의 부하인 배훤백의 화살을 맞고 도망하였다. 균정은 죽고 제륭이 즉위하여 제43대 희강왕이 되었다. 희강왕 3년 상대등 김명 등이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핍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 이후 김명이 즉위하니 제44대 민애왕이다.
이 소식을 들은 균정의 아들인 우징이 청해진에 가서 장보고와 결탁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자 김양은 병사를 이끌고 합세하여 왕실을 공격해 마침내 왕을 살해하였다. 김양이 우징을 맞아 즉위케 하니 곧 제45대 신무왕이다. 막강한 권력을 쥔 김양이 자기에게 화살을 쏜 배훤백을 불렀다.
“개는 의례 자기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너는 네 주인을 위해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관계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김양의 대범함에 모두가 감탄하였을 것이다. 왕위에 오른 지 채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신무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니 제46대 문성왕이다. 두 왕 모두 김양으로 인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2대에 걸쳐 킹 메이커(king maker)의 역할을 한 김양이 향년 50세에 죽자 왕은 애통해하며 최고의 관등인 서발한으로 추증하고 장례를 김유신의 구례에 따랐으며 태종무열왕의 능에 배장하였다.
조선초기의 관찬서서인 『동국통감』에는 김양을 김유신에 버금가는 인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인물을 논하자면 영웅호걸은 김유신만한 이가 없고, 명백정대(明白正大)하기로는 김양만한 이가 없다. … 그의 사심 없는 순수한 충정과 큰 절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김양묘라고 전해오는 무덤은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앞쪽 약 15m 지점에 있는 둘레 약 60m 되는 원형봉토분이다. 특별한 장식은 없으며 1982년 8월 4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7세기에 조성된 김인문 묘보다 2m 이상 축소되었으며 봉분 자락은 이전 시기와는 달리 호석과 받침석이 없다.
묘의 위치가 태종무열왕의 능에 배장하였다는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과 일치하기는 하지만 그가 김균정과 김균정의 아들인 신무왕 그리고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크게 공을 세웠기에 문성왕이 장례 절차를 김유신과 같이 하라고 했음에도 그의 묘는 아무런 장식이 없어 김유신묘와는 다르다. 그래서 현재 김양의 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