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7년 함경도 문인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은 경주를 찾아 곳곳을 유람하고 남산 자락에 있는 인산서원을 찾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인산서원은 반월성 서쪽 수백 걸음 떨어진 남산 아래에 있는데 우암(尤菴) 송시열 선생을 모셨다. 영당(影堂)이 있고 영당 아래에는 강로당(講魯堂)이 있다. 강로당에는 동ㆍ서 두 방 사이 난간 하나가 있다. 강로당 아래에 동ㆍ서재가 있으니 동재는 모정재(慕程齋)이고 서재는 술주재(述朱齋)다. 1767년 12월 5일 나는 이민숙과 함께 유상(遺像)을 뵈었는데 늠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을 일으키게 하였고, 양주의 강천정(江泉亭)에 모셔진 본과 견주어 조금 달랐다(『鐺洲集』卷15,「遊錄.東京遊錄」,“仁山書院在半月城西數百步南山之下, 祀尤菴宋先生. 有影堂, 堂下有講魯堂. 堂有東西兩房間一軒, 堂下有東西齋, 東曰慕程齋, 西曰述朱齋. 十二月初五日, 余與李君敏叔, 瞻謁遺像, 凜然令人起敬, 視江泉亭所安本稍異焉”). 영남남인의 땅 경주부에 세운 노론계 인산서원은 1719년 봉암영당을 시작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1764년 어느 날 남산의 인왕산 자락에 인산서원 편액을 걸었으나, 1864년에는 서원철폐령을 피하지 못하고 훼철되었으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렵다. 박종은 인산서원 편액 이후 남산의 인산서원을 찾아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배알하였다. 앞서 영남땅에 세워진 노론계 서원 인산서원은 1725년 일어난 을사사화의 진앙지로, 영남남인들이 화를 당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18세기 경주지역 향전의 중심지였다. 향전은 지역 유림간의 격돌을 뜻하는데, 당시 우암 송시열 유상을 놓고 경주유림 간에 다툼이 있었다. 당시 숙종년간의 환국과 혼란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 경주도 중앙세력의 견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1689년 우암 송시열 사후 전국적으로 우암 숭모사업이 일어나 서원건립이 도모되면서, 대구의 전극화·전극초 형제의 노력과 포항의 오도전(吳道全) 등이 합세해 1704년 거제도에 반곡서원(盤谷書院)이 세워지고, 1707년에는 포항에 죽림서원(竹林書院)이 건립되어, 우암의 노론계 세력이 영남에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당시 무분별한 서원건립으로 조정에서 서원첩설금지령이 내려질 정도의 엄격한 분위기였지만, 우암의 배향을 막지 못할 정도로 당쟁이 노론으로 기울었다. 경주부 역시 1717년 상소를 올려 서원건립을 도모하였고, 노론계 부윤 이정익(李禎翊,재임1718.9~1720.8)의 도움을 받아 1719년 남산 인왕산 자락에 봉암영당을 건립해 우암영정을 모셨다. 봉암영당 건립 이후 1722년 정권이 바뀌어 남인계 권세항(權世恒,재임1722.4~1723.2)이 경주부윤으로 오면서 지역유림과 합세해 조정의 명을 빌미로 봉암영당을 훼철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때 곡산한씨 가운데 진사를 지낸 한시유가 장살(杖殺)로 죽게 되면서 지역유림의 갈등과 향전은 심화된다. 하지만 신임옥사 이후 집권세력이 노론으로 바뀌면서 1725년 노론계 조명봉(趙鳴鳳,재임1725.5~1725.11)이 경주부윤으로 오면서 지난 1722년의 사건을 노론계의 입장으로 재조사하면서, 많은 수의 남인들이 화를 당하는데,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 또는 계림사화, 鄕戰이라고 부른다. 당시 계림사화를 당해 권세항과 동조한 자들은 삭탈관직되고 유배에 처해지는데, 남인계 우와 이덕표 그리고 태화당 이광희 등 10여명이 큰 화를 당하였으며, 지금도 이들의 후손들이 ‘십가계(十家契)’를 조직해 선조의 무고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노론계 한문건 등은 『인산서원실기』를 엮어 당시 상황에 대해 상반된 기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이 경주뿐만 아니라 전국적 곳곳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발생하는데, 특히 경주는 세월이 지나 1775년에 다시 1722년과 같은 사건이 거듭 일어나 어느 지역보다도 향전이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니, 향전은 불안정한 정국이 빚어낸 지역유림간의 참담한 결과로 안타까움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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