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녀석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드론(drone)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 초등학생이 사용하기에 적당한 초급자형으로 무엇이 좋을지 인터넷으로 미리 검색을 해 두었던 터라 진열된 여러 모델 가운데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드론, 그까이꺼 뭐 대충 그냥 건전지 넣으면 날아가는 건 줄 알았다. 스마트폰과 연동이 되어야 실제 드론 밑에 달려 있는 카메라로 영상도 찍고 그걸 손에 든 스마트 폰으로 확인해 가며 조정 장치로 조정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이 의외로 복잡하다. 아니 수정한다. 기계를 잘 만지고 그런 걸 좋아하는 아빠들이야 쉽겠지만, 어릴 때 손바닥만한 프라모델 하나 조립하는데 하루 꼬박 걸리는 불량(?)아빠인 경우는 좀처럼 어려운 미션이 아닐 수 없다.
드론을 들고 이것저것 마구 만져보다가 마음대로, 예상한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급기야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즈음이면 애 엄마가 등장한다. 참고로 좌뇌(左腦)형인 애 엄마는 내장(?)을 드러낸 드론을 앞에 두고 침착하게 설명서를 또박또박 읽어나간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 없이 드론을 집어 들더니 이것과 저걸 연결하고 스마트 폰으로 드론 박스 표면에 있는 뭔가를 찍더니만 프로그램을 다운로딩 받았는지 스마트폰과 연결한 후, 이미 흥분해 얼굴이 벌게진 남편에게 드론을 넘겨준다. 이제 날 거라는 무미건조한 말 한마디와 함께….
그렇게 건네받은 드론으로 수업만 마치면 운동장으로 쪼르르 달려나가던 녀석이 며칠도 안 돼 한다는 소리가 “아빠, 난 야구가 너무 좋아, 야구선수를 해야 할까 봐” 하며 언제 샀던지 알루미늄 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렇게 원하던 드론을 손에 넣은 지 얼마 됐다고 이 녀석은 다른, 더 커 보이는 행복을 찾아 부나방마냥 날아갔느냔 말이다. ‘적응(adaptation)’, 분명 이놈의 짓이다.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만족을 모르고 더 강한 자극을 끊임없이 추구하게끔 만든 장본인 말이다. 더 큰 평수의 아파트나 더 큰 배기량의 자동차라도 금방 시큰둥하게 만들어 버리는 적응은, 짜릿한 행복을 그저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있다. 다행인지 불행이란 놈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슬픈 일이 닥쳐도 시간이 지나면 툴툴 털고 일어나게끔 만드는 것도 적응이다.
행복도 그 반대도 결국 시간문제다. 영원한 행복이란 그래서 더 간절한 법이다. 독일 어느 연구에 의하면 결혼이 주는 행복은 5년이, 아이를 가질 때 느끼는 행복은 2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 한다. 세상에 뭐 도무지 신나는 게 없다.
상황이 이러니 남들은 나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지 궁금해서, 아니 조바심이 나서일까 SNS에 남이 올린 사진들에 그렇게 목을 빼나 보다. 지하철, 도서관, 카페고 간에 죄다 남의 사진들만 보고 있는 집단무의식은 불행히도 다들 행복해지고 싶어서일 것이다.
사실 멋진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홀짝이는 우아한 모습은 전부 ‘설정’이다. 다들 그런 줄 알지만 사진 속 친구만큼은 정말 행복할거야 믿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SNS에 올린 사진들은 죄다 니글거릴 것 같은 스테이크나 크림소스 스파게티이지 현실감 물씬 나는 김치찌개나 칼국수가 아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행복이 더 오래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남의 행복을 필요 이상으로 과대 포장하는 ‘초점착각(focusing illusion) 현상’ 때문이다. 여러 번의 선별 과정을 거쳐 올린 남의 사진 몇 장으로 ‘아, 쟤는 저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단 말이야?’ 하고 믿어버리는 식이다.
내 행복은 적응으로 얼른 회색으로 만들고, 남의 행복은 총 천연색 무지개로 만드는 한 자신의 삶과 현실은 시시해져만 간다. 실제 우리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6명이 ‘SNS에서는 자신의 행복한 모습만 보이고 싶다’는 응답이나, 미국 미시건 대학의 ‘SNS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일수록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일반인보다 2.7배 높다’는 연구 결과나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