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울 경주재발견 새로운 시작, 오디세이! 우리는 참으로 보배로운 경주에 살고 있다. 기자는 ‘경주 재발견’이라는 기획을 2013년 1회를 시작으로 2017년 8월까지 5년간 총 142회 연재했다. 이번에 다시 기획하는 ‘경주 오디세이’는 지금까지 연재해왔던 경주재발견의 연장선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보다 전문적이고 아카데믹한 내용으로 접근하고 구성하려 한다. 경주 문화예술 현상들과의 연계를 바탕으로, ‘히든(hidden) 경주’를 찾아 조명하는 등 다양한 주제로 고찰해본다. “건천읍 모량리 저의 ‘오두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독문학자 김연순(91) 교수가 손수 일군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베른하르트’ 문학관. 박목월의 생가가 이웃해 있는 경주시 건천읍 모량2리 583-17번지에 있는 이 문학관을 김연순 교수는 ‘오두막’이라 부른다. 모량리 마을회관을 지나 좁은 농로를 따라 간 문학관의 대문 오른편에는 ‘베른하르트 문학관’, ‘한독문화연구소’라고 새겨진 현판이 고졸하게 걸려있다. 간판에서도 검박한 김 교수의 성품이 그대로 전해진다. 김 교수는 이 위대한 작가를 한국에 소개하고 알리고 있다. 그가 건천읍 모량리에서 소박한 문학관을 지키며 홀로 30년째 살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문학을 호흡할 수 있는 이곳은 문자 그대로 ‘문고 보관실’이었다. 베른하르트라는 위대한 거장을 통찰한 김 교수의 집중력은, 노구임에r도 생의 과정 속에서 만난 충만한 기쁨이 함께하는 듯 했다. 깊은 사색과 예지로 빛나는 그의 눈빛이 그러했고 정성을 들인 적확한 언어와 균형잡힌 견해로서 기자에게 이 훌륭한 거장의 문학적 업적과 문학관의 어제와 오늘을 말하는 것이 그러했다. 단아한 학자의 풍모에서 우러나오는 푸른 정신성이 기자에 전해진 것은 물론, 김 교수의 입매에도 어느새 우아한 활기가 감돌았다. -문학관 손수 일구고 지키는 김연순 교수, “전 유럽에서 이토록 문제시되는 작가가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음이 의아” 김 교수는 1927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태어나 동나남고등학교와 원산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교편을 잡다가 공산치하의 박해와 인간의 존엄성, 자유, 민주주의 등을 막연히 그리면서 목숨 걸고 38선을 넘어와 남녘의 타향살이에 들어갔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 독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뮌헨대학 동양학부 강사, 뮌헨대 독문과 객원교수로, 동아대학교 독문과 교수로 제자를 양성하다가 1993년 정년퇴임했다. 독일 괴팅겐의 집을 떠나 현재 이곳 모량에서 30년째 살고 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한국전쟁, 남북 분단 등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거쳐 온 김 교수는 숨가빴던 인생 역정을 고백하는 자서전 ‘내겐 돌아갈 고향이 없다’(새로운사람들 출판·1995)를 출간한 바 있다. 또한 김 교수는 베른하르트의 작품인 ‘혼란·한 아이(범우사 1991)’를 번역 출간해 가장 먼저, 국내에 베른하르트 문학을 소개했다. 또, 독일문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을 위한 ‘독문학용어사전’(탐구당 1992)을 펴내기도 했다. 김 교수는 베른하르트는 소설 ‘혼란· 한 아이’를 번역하면서 “베른하르트는 독자들로부터 열광적인 갈채를 받는 동시에 엄청난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킨 세기의 극작가요, 가장 중요한 언어의 거장으로 불린다. 독일어권은 물론, 전 유럽에서 이토록 문제시되는 작가가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음을 의아스럽게 생각해오던 끝에 번역하게 됐다”고 했다. 김 교수로 인해 베른하르트의 대표작들이 번역되고 그를 연구한 한국의 독문학 박사들도 탄생했다. -‘모량재(毛良齋)’... 기억속에 존재하는 고향 함경도의 집 ‘과목장’ 김 교수는 동아대 교수 재직 당시인 1987년 섣달, 우연한 기회로 “이곳을 다니러 왔다가 30년째 독일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웃음). 모량리에 집 보러 갔다가 청청한 대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뜰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습니다. 월급과 퇴직금을 담보로 국민은행에서 200만 원, 연금공단에서 300만 원 해서 모두 500만 원을 빌려 집을 지었습니다. 건축학과를 갓 졸업한 조카와 모량에 사는 목수를 동원해 한 달 반 만에 집을 지었어요. 벽돌 한 장 한 장 나르고 쌓아올리고 흙 한 양동이씩 퍼내고 퍼들이면서 지은 장막이었기에 나의 손자국과 끈끈한 애착이 배어 있지요”라고 했다. 이렇게 지은 ‘모량재’는 김 교수의 한국 땅에 있는 유일한 ‘내 집’인 동시에 기억속에 존재하는 고향 함경도의 집 ‘과목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거장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enhart 1931~1989)는 어떤 작가였을까? ‘독일 현대문학의 카프카’로 불리는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사생아로 태어난 것에 대한 상처와 굴욕, 전쟁과 빈곤 등 뿌리없는 삶으로 점철되었다. 뷔엔나 예술대학에서 음악과 연극 수업을 받았고 1953년 신문사에서 자유기고가로 법정관계 기사, 르포, 연극, 영화 평론을 쓰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70년대 이르러 독일 문단에서 높이 평가 받으며 게오르그 뷔히너 상 등 주요상을 수상했다. 질병, 혼란, 고독, 파멸, 죽음, 정신착란 등을 테마로 한 그의 독특한 작품 세계는 극도의 부정적인 시각,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간의 속박을 거부하는 데서 오는 고독과 고립 등 인간 존재의 부정적인 면을 강렬하게 반영하고 있다. 베른하르트는 나치의 침략과 보수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끊임없이 기득권층과 갈등하면서 문학을 통해 고발해 왔고 결국 죽음을 통해 오스트리아에 일침을 가했다.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에는 자신의 사후 작품을 저작권법 유효기간(70년) 동안 작품을 출판하거나 공연하지 못하도록 유서를 남기고 1989년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현대독일문학에서 가장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은 ‘추위’ ‘혼란’ ‘석회공장’ ‘소멸’ 등의 소설과 ‘보리스를 위한 파티’ ‘무식한 사람과 미친 사람’ 등 수많은 희곡이 있다. -‘베른하르트 문학관’, ‘한독문화연구소’...경주 문화 자긍심의 한 축 지난 6일 찾은 베른하르트 문학관에는 김 교수와 함께 독일에서 잠시 귀국한 장남인 박재원 박사가 함께 했다. 모량리 주민들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면서 어느새 주민들 마음속에 자긍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문학관은 작가의 조국인 오스트리아의 베른하르트 문학관 보다 3년 앞서 만들어진 문학관이다. 또한 그곳에서조차 보유하지 못한 희귀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는 실로 대단하다. 베른하르트는 그의 뛰어난 문학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독자들에게 아직 익숙치 않은 이름이다. 김 교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문학작품을 한국에 번역 소개하고 그의 문학세계를 연구하기 위한 베른하르트학회를 구상하던 무렵, 거주하던 집 모량재(毛良齋)에 베른하르트 문학관(Thomas-Bernhard-Archiv)을 열었다. 독일어 아르히브(archiv)는 영어 아카이브즈(archives)로 문서, 고문서, 기록집, 자료 등의 보관소를 뜻한다. 김 교수는 “베른하르트 문서실, 또는 자료보관실, 문고 라는 표현이 정확하지만 여러 사람의 제안에 따라 총칭해서 ‘베른하르트 문학관’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어디 등록하지도 않았어요. 다른 이들의 원조를 받기 싫어서였지요”라고 했다. 오스트리아와 여러 단체의 후원 제안 등도 모두 고사했다는 이 문학관은 오롯이 김 교수의 출연인 것이다. “베른하르트 문학관으로 두 해 정도 운영하다가 한독문화연구소로 통합해 포괄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베른하르트와 독일 문학뿐 만 아니라 한국의 문학권역도 깊이있게 연구하고 발표하는 학술연구활동의 장소로도 역할하고 있습니다”며 한독문화연구소내에 베른하르트 문학관이 함께 기능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문학관에는 죽제실, 현정실, 과목장(고향 함경도의 집 이름) 마리아실, 휴게실(쉼터) 등으로 구성돼 있다. 문학관 내 서가에는 베른하르트의 사진들과 김 교수가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모은 베른하르트 작가 관련 저술 100여 권을 비롯해 독일에서 발표한 연구 논문, 베른하르트에 관한 논문 자료와 번역본, 사진, 신문·잡지 스크랩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 문학관 관계자들이 이곳을 찾고 베른하르트의 문학 자료 등을 보내오고 있으며, 전국에서 김 교수의 제자들을 비롯한 베른하르트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연구와 토론을 펼치고 있다. -“자유롭고 소박한 테두리 안에서 문학에 국한되는 것 아니라 모든 문화 연구활동 이뤄졌으면” 김 교수는 최근에도 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데 도서 규모나 소박한 문학관의 외관만으로 폄하해 판단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일침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이곳에는 베른하르트 전집 20권과 나란히 괴테 전집 20여 권, 토마스 만 전집, 헤세 전집 등이 비치돼 있다. 특히 베른하르트 전집은 지난해 영어 번역본을 처음으로 20권을 구해 비치하고 있다. 김 교수는“그의 작품은 잘 팔리진 않았지만 독일에서 그를 주제로 석박사 논문을 쓰는 이들이 일년에 400명일 정도입니다. 작품량이 괴테와 맞먹을 정도로 방대하지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공식화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저, 이 아카이브즈 정체성 그대로 잘 보존됐으면 합니다”라고 전했다. 장남인 박재원 박사는 “‘한독문화연구소’가 의미있다고 봅니다. 문학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 활동인 것입니다. 독일과 한국이 어떤 형태든지 이 자유롭고 소박한 테두리 안에서, 관리를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익하게 사용된다면 그것이 어머니의 뜻에 맞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성과를 낸다거나 행사 위주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보다는 지속가능하게 최소한의 조건들을 만들어 놓고자 합니다.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수렴하고 동네 주민들과 소통하는 것, 주민들이 가족처럼 대해줘 그것이 큰 자산입니다” “30년 동안 존속한 문학관을 이 동네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여겨 주시고 뿌듯해하시니 기쁩니다. 이 동네의 자존심이고 정체성이라고 하시니 더욱 감사하고 그것이 가장 큰 보람이죠”라고 말했다. 한편, 김 교수는 문학관 운영 관리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주고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준 (재)경주예술의전당 김진룡 사무국장에 대해 연신 감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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