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문묘를 찾아가려면 서천교를 지나 바로 좌회전을 해야 한다. 이 길은 과거 대구로 가던 국도인데 갯들 가운데를 지난다. 갯들은 경주에서 곡창지대로 알려져 있었다.
이곳 탁 트인 벌판 한가운데를 지나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길 좌우에 딸기를 비롯한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여러 동의 비닐하우스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 갑갑한 느낌이다.
‘갯들’은 ‘개의 들판’이다. ‘개’란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을 이른다. 또 ‘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라는 의미도 있다. 서천이 범람하면 이 일대는 온통 물에 잠기게 되어 ‘갯들’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홍수 때 강 상류에서 내려온 침전물로 경주 어느 지역보다 비옥한 땅이다.
벼들이 곱게 익어간다. 익어가는 벼 냄새를 맡으려 차창을 열었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콧등이 간질거린다. 서쪽이나 서북쪽에서 선선하게 불어오는 이 바람을 하늬바람이라고 한다. 가을에 분다고 해서 갈바람이라고도 한다.
바람에 대한 순 우리말로는 동풍을 샛바람, 남풍을 마파람, 북풍을 댑바람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이런 말들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하늬바람에 절로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중앙선 철로 아래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무열왕릉이 보이고, 왼편으로 2기의 고분이 있다. 그 중에서 비각이 있는 쪽이 김인문의 묘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구로 가는 국도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무열왕릉과는 동일 능묘역(陵墓域)이었던 것이다. 이 묘의 남쪽으로 조금만 비켜 길을 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김인문의 장지에 대해서 『삼국사기』 「열전」에 ‘窆于京西原(폄우경서원)’이라고 해서 왕경 서쪽 벌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묘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각간묘 또는 김양묘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1968년에 이병도가 김유신묘라고 주장을 하였다.
1932년 이곳으로부터 서북쪽으로 200여 미터 서악서원 영귀루 북편에서 비편이 수습된 적이 있는데 이 묘의 동북쪽에 있는 비각 속 귀부의 비신 홈과 이 비편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비문의 내용 일부를 판독하여 김인문묘로 인정하게 됐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 배우기에 힘써 유가의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동시에 장자와 노자 그리고 불교 서적을 널리 섭렵했다. 또한 글씨를 잘 쓰고, 활쏘기, 말 타기, 향악을 잘 하였다. 이처럼 기예에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했다.
그의 형은 훗날 문무왕이 되는 법민이고 동복아우로는 문왕, 노차, 지경, 개원 등이 있는데 모두 각간 벼슬을 하였고, 문희 즉 문명왕후의 소생들이다. 이복아우는 개지문, 차득, 마득 등과 여동생을 합하여 모두 다섯이었다.
『삼국유사』의 이 기록과는 달리 『삼국사기』에서는 문왕, 노차, 인태, 지경, 개원 등이 무열왕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또 여자형제로 대야성 도독 품석의 부인인 고타소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무열왕과 문명왕후와의 사이에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화랑세기』에는 보량궁주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인문은 7차에 걸쳐 22년 간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를 하였다. 숙위란 당시 당나라 주변국가의 왕자들이 당의 군주를 호위하는 제도로 신라의 경우에는 외교사절 등 다양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651년(진덕여왕 5) 인문의 나이 23세 때 당나라 고종은 그를 좌령군위장군을 제수했다. 이후 660년(무열왕 7)에는 당나라 군대의 2인자인 신구도행군부대총관에 임명된다. 또 668년 형인 문무왕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4년 문무왕이 당나라를 배신한다고 생각한 당 황제는 왕의 관작을 박탈하고 인문을 새로운 신라의 왕으로 내세웠으나 인문은 이를 간곡히 사양했다. 이후 문무왕이 형식상 사죄사를 보내자 황제가 이를 받아들여 인문은 도중에서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후 인문은 694년(효소왕 3) 당나라 수도에서 죽어 유해를 신라로 호송한 후 이곳에 묻혔다. 훗날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을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