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꽃이 하얗다. 가을은 떠나가도 꽃향기는 바람에 스며 남을 것이다. 그 꽃향기처럼 구림 이근식 선생이 9월 28일 우리 곁을 떠났다. 구림은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197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태어난 곳도 인근 마을이다. 그래선지 시선집에 실린 「빈 것에는」,「목련나무에는 목련꽃이 피고」,「노자의 물」같은 시편들이 유난히 목월 풍으로 다가왔다. 구림은 시의 미학적 아름다움에 더하여 시인으로서 지켜야 할 품격을 보여준 분이다.
-선비정신과 구림
‘학 같다’ ‘보리 까끄라기 같다.’는 말은 구림 선생의 삶을 떠올릴 때 언뜻 가슴에 스쳐가는 표현이다. 그만큼 그는 고고하고 염결했다. 실제로 구림 선생 시의 궁극적 지향은 선비정신이다. 이 정신으로 탁류같은 역사와 세상을 버티어 왔던 것이다. 그 면모를 몇몇 시편을 통해 살펴보자.
“짓밟아도 때 묻지 않는/이조 선비 같은 사람들이/살고 있는 이방지대”「겨울 보리밭에서(2)」, “이조의 슬픔/그 지조로 문명과 외면하고 있다”「주현리는 누워 있다」, “이 길을 돌고 돌아가면/천 리 먼 곳에/이마 푸른 옛 선비와 만나리라”「수봉정에서」, “이조 이야기를 도란거리고/말복에서 처서로 건너가는 볕살”「만취정 가는 길」, “상하이 노신공원에서/이글이글 타고 있는 조선숯덩이를 만난다”(「노신공원에 핀 장미」), “조선의 마른 선비, 네가 아니면/흔들리며 처진 머리를 바로 세우겠는가”「가을꽃」, 구림은 겨울 보리밭과 가을꽃과 정자, 심지어 볕살에서도 선비의 지조를 발견한다. 또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서 자신이 지향해야 할 정신을 발견한다. 이렇듯 선비정신은 사람과 사회, 자연의 관계맺음에 대해 인식하고 다양한 존재들과 상호 조화를 통해 형상화된다.
심지어 “너는 선비가 아니라 시정잡배라고/썩 물러가라는 호통소리”「매화 구경」를 듣기까지 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 속에 선비정신이 녹아 있는 것이다. 구림은 “한평생 가녀린 풀벌레 소리로 떨며/세상을 건너왔다.”「내 소리를 내가 듣는다」고 말하지만, 시인과 풀벌레를 치환은유로 범박하게 묶을 수 없는 미학성이 그의 시에는 녹아 있다.
-구림 미학의 본질(1) - 자아와 세계의 열린 구조
등단 무렵 쓴 짧은 시 한 편을 통해 구림 시에 공통적으로 녹아 있는 미학을 살펴보기로 한다.
화엄사를 돌아 나와
허술한 찻집에서
작설차를 마신다.
향긋하고 냉랭한
산골 여인의 인정 같은
그 맛.
지리산 멧새의 울음소리가
방안 가득 퍼진다.
-「작설차를 마시며」 전문
감상성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허술한 찻집에서 마시는 작설차는 찬 것이었던가. 그러나 “향긋하고 냉랭한/산골 여인의 인정” 같은 표현은 서늘한 객관화의 극치에 이른 느낌이다. 마지막 두 행에 이르러 이 시는 미각에 멧새 울음이라는 애절한 청각이 합쳐지면서 공간을 한없이 열어놓는다. 여백을 예기한 독자에게 한없이 그득하게 퍼져나가는 감각의 신선함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작설차의 맛과 향기가 멧새의 울음이 되어 주변의 공간에 퍼지는 상상력, 맛에 사람의 인정과 멧새를 불러내어 생태적인 본질로 회귀시키는 이런 류의 상상력은 구림 시의 미학적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지면 관계상 다 살필 수는 없지만 이는 「모량부의 여울(4)」에서 갈새의 울음이 나귀의 방울로 다시 달과 별, 풀잎 이슬, 염불소리로 변주되는 지점으로 이르고, 떠나신 아버지가 흰 구름으로, 도라지꽃 빛깔로, 바람소리 방울새 소리로 살아 있음이 발견「省墓」Ⅰ 되기도 한다. 또 “내 몸에서도 빛이 번쩍이며/꽃눈이 터져 나온다.”「꽃눈으로 마감하고 싶은 새벽」고도 하고, 경칩이 지난 하늘 아래의 생명을 돌/생명, 거름/꽃눈 등 어디로 튈지 모르게 끌고 가는 데서도「경칩이 지난 하늘 아래서」여실히 드러난다. 구림은 시적 출발부터 화자 우월주의를 버리고 대상과 녹아 있는 상태를 구현했다. 이는 구림이 섣부른 화자 우월주의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재단하고 판단하는 위험을 내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증거다.
구림의 시에서 자연과 세계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분별이 없는 열린 구조를 가진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체들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 속에서 평등한 관계로 살아간다. 이는 바로 자연과의 생태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구림의 미학적 본질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