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라시 정창원에는 신라시대에 건너간 ‘신라금(新羅琴)’ 세 대가 있다. 신라시대에 제작된 현악기 유물이 국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악기는 비록 국외에 있지만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 악기는 근대 1908년부터 최근까지 110년 동안 대부분 학자들이 가야금으로 인식했다.
그 이유는 현재 정악가야금과 악기 구조가 닮았고 악학궤범 가야금 구조와도 닮았으며 신라 토우에 나타난 현악기 구조와도 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국사기 가야금 제작 관련 사료에 집착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김성혜(경상북도문화재전문위원·경주문화원부원장) 교수는 신라 토우에 표현된 현악기가 가야금이 아니라 신라의 금(琴), 즉 신라금(新羅琴)이라는 주장을 펼쳐 기존의 학설에 지각 변동을 유발하고 있다. 일본의 정창원에 있는 신라금은 ‘신라금’이며 ‘가야금’이 아니라는 주장을 구체적인 10가지 강력한 근거를 들면서 지난 8일 개최된 ‘신라금·신라고취대 학술대제’에서 논증했다.
지나칠 정도로 가야금에 편중된 견해를 논거를 통해 반박하고, 편견에 갇힌 신라인들의 악기인 신라금을 세상밖으로 천명해 낸 것이다. 학술대회 이후 큰 반향을 이끌어내고 있는 김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신라금이냐? 가야금이냐?는 비록 악기 명칭에 관한 문제지만 역사를 올바르게 세우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
김성혜 교수는 “신라인들의 악기, 신라인들의 음악 문화가 그동안 학자들의 편견으로 역사에서 가려지고 왜곡돼 신라금이 역사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는 것으로 첫 일성을 대신했다. “묻혀있던 신라금을 이제 세상 밖으로 꺼내 그 존재를 알리고 가치를 다시 한 번 새겨보고자 합니다. 신라금이냐? 가야금이냐?는 비록 악기 명칭에 관한 문제이지만 역사를 올바르게 세우고 시비를 가림에 있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먼저, 신라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창원 신라금을 학자들이 왜 가야금으로 인식하게 된 것인지 이유를 밝히고 정창원의 신라금을 가야금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명확한 10가지의 근거로 요약해 발표했다.
-가야금으로 보고 있는 정창원 ‘신라금의 진실’, 신라금을 가야금으로 인식한 근거는 무엇?
정창원에 소장중인 신라금 3대는 금니신라금, 금박신라금, 동대사명 신라금(잔궐신라금)이며 이 외 안족, 신라금갑, 양이두 2점 등이다. 특히 양이두는 양의 귀 머리모양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신라금의 매우 큰 특징이다. 거문고나 중국, 일본의 금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다. 우리나라 가야금과 신라금에만 있는 것으로 이는 세종실록과 악학궤범에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 토우에서도 보여진다. 세종실록에도 가야금이라 명기돼 있어 지금까지 가야금으로 인식해 왔으며 따라서 토우에 있는 것도 가야금이라 보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금을 가야금으로 오늘날까지 알고 있었던 학설들은 무엇일까?
1908년 시미즈 후미오는 ‘新羅琴 考’라는 신라금의 일본 유입시기에 대해서 쓴 글에서 5세기 중엽인 453년 윤공천황 때라고 주장(일본서기)한다. 1909년 후루야 기요시는 정창원의 신라금은 현재 한국에 없고, 유사한 악기로 사용되고 있는 ‘(정악)가야금’이라는 것에 착안한다.
삼국사기 가야금 제작 유입 관련 기록에 의거해 가야금이 신라에 전해진 것이 진흥왕(540~576) 때이므로 6세기 중엽 이후 유입설을 주장한다. 가야에서 가야금이 551년에 왔다면 일본에 올려면 적어도 551년 이후여야 한다. 따라서 시미즈 후미오가 주장한 453년 윤공천황때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또, 신라금으로 불린 것은 신라인이 일본에 금(가야금)을 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런 근거들로 신라금을 가야금으로 보았다고 했다.
후루야 기요시의 학설은 우리나라 학자와 일본인 학자들이 동시에 수용돼 특별한 논증없이 지금까지 반영돼 왔다. 그리고 1950년 이혜구(1909~2010) 선생은 특히, 신라토우의 현악기 양이두는 정창원 금과 같다고 하면서 신라토우를 가야금으로 보았다. 일본 문헌에는 ‘신라금’이라는 기록이 많은데 그것도 가야금으로 해석했다. 한편, 이진원 선생은 대전 월평동에서 출토된 양이두를 근거 자료로 제시하면서 가야금이라 주장한다. 신라금을 가야금으로 본 이유를 다시 한 번 요약하면, 신라토우의 양이두, 삼국사기의 가야금 기록, 신라인이 가야금을 일본에 전했기 때문, 악학궤범의 가야금과 정악가야금의 구조 유사, 대전 월평동 출토 양이두 라는 것이 그 주장들이다.
-그렇다면, 정창원 신라금이 가야금이 아닌 10가지 이유
이러한 다섯가지 학설을 비교분석한 김 교수는 5가지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면, 결국 정창원 신라금이 가야금이 아닌 이유와 상통한다면서 정창원 신라금이 가야금이 아닌 10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반박했다. 정창원 신라금을 가야금으로 본 기존학설 5가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이에, 다시 5가지 근거를 추가해 발표한 것.
첫 번째, 기존 학설인 ‘신라토우의 현악기=가야금’ VS ‘신라 토우는 가야 유물이 아니다’-신라토우의 현악기는 정창원 신라금이자 가야금으로 보아왔다. 이는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신라토기에 의한 고분 편년의 제 견해에 의하면, 토우는 300년~520년까지 제작돼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이 토우는 가야금이 제작되기 이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신라 토우와 가야국 가야금과는 연대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연결지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정창원의 양이두는 신라 토우에 있는 양이두와 같기 때문에 신라금=정창원 신라금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야금 이전에 존재한 신라 금(琴)의 기록이 있다’-530년경 가야국 가실왕이 12현금을 제작해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귀의해 악기 이름을 ‘가야금’이라 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는데, 가야금 이전에 존재한 신라 금(琴)의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계자는 내해니사금(196~230)때 사람이다. 琴을 들고 사체산으로 갔다. (삼국유사)’, ‘백결선생(자비왕 때 사람 458~478)은 琴으로 방아소리를 냈다. 대악(碓樂)이다.(삼국사기)’ 등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이 존재하므로 가야금 이전에 존재한 신라금에 대한 기록은 토우에 나타난 그 악기를 말해 주는 것이다.
세 번째, ‘신라인이 일본에 가야금을 전했기 때문 VS 신라인은 일본에 (신라)금을 전했다’-신라와 일본이 당시 국제 교류를 하면서 일본 사관들은 다른 기록에서처럼 출처와 신분을 매우 정확하게 기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신라인이 일본에 (가야)금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번째, ‘정창원 신라금=악학궤범 가야금이며, 현재 정악가야금이다.VS 악학궤범 가야금과 정악가야금은 신라금보다 후대의 사료이다’-악학궤범은 조선조 사료다. 이는 가야금을 입증하는 적극적 자료가 되지 못한다. 김 교수는 “정창원 신라금은 이들보다 앞 시대 것으로, 이보다 앞선 것이 신라 토우입니다. 이 신라금이 왜 조선시대 가야금으로 둔갑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다섯 번째 ‘대전 월평동의 양이두=한반도 남부의 현악기 구조VS 대전 월평동의 양이두는 신라금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이진원 선생의 한반도 남부의 현악기 구조와 가야금도 이러하다는 주장에 대해, 대전 월평동의 양이두는 신라의 영역이 확대된 시기여서 신라의 신라금이 유입됐을 수도 있으며 백제가 신라금의 영향을 받아 제작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견해다. 이로써 5가지 기존의 학설에 대한 반증과 함께 아래 제시하는 5가지 학설은 김 교수가 연구해 밝힌 것이다.
여섯 번째, ‘사금갑의 실체가 정창원의 신라금궤이다’-삼국유사 소지왕 10년(488) 서출지 ‘사금갑(射 琴匣, 금갑을 쏴라)’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금갑이란 현악기인 금을 넣는 상자를 뜻한다. 따라서 가야금이 유입된 551년보다 이전이고 이미 금이 있었고 금을 넣는 금갑이었다는 것.
일곱 번째, ‘통일 후 금(琴) 관련 기록의 해석, 통일 후 琴, (가야금이 아니라) 신라금이다’-김 교수는 음악과 악기는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면서 결국 악곡이 같은 계열이면 악기 역시 같은 계열의 악기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더욱이 가야금이 유입되기 약 100년 전 백결 선생이 연주한 금이 신라금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음악인 대악은 신라금으로 연주한 악곡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음악이 807년 대금무로 연주됐고 편성된 금 역시 신라금으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모두 가야금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은 오류입니다. 국내 문헌 중 신라금으로 명시된 기록은 없으나 이는 신라금 뿐만 아니라 백제금, 고구려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사기의 가야금이라는 명칭은 신라에 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야국에서 국경을 넘어 신라로 건너온 사건이었기에 기존의 신라금과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라본기에 기록된 금은 신라금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여덟 번째, ‘일본 사료에 ‘금’, ‘신라금’이라고 명시돼 있다’-765년 정창원 헌물장에 ‘신라금’ 두 대가 정창원에 납입되었다, 816년 신라인 사량진웅이 ‘新羅琴’을 잘 탔다(일본문덕천황실록), 823년 잡물출입장에 ‘신라금’ 2대가 대출되었다 등으로 신라금이 분명하게 명기돼 있으나 기존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들 모두를 가야금으로 해석했다. 당대 사관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은 입장을 취한 격이 되는 것이다.
아홉 번째, ‘신라인이 가야금을 수용한 것은 12현이다’-가야국에서 12현이 들어오고 기존의 신라금에 12줄을 수용한 것 같다. 조선 후기까지 12줄 가야금이 전해졌다. 신라인들도 신라토우에 나타난 구조에다 현을 추가해 이것이 700년대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정창원 금이 12줄이라는 것이다.
열 번째, ‘가야춤과 가야악은 신라에 정착하지 못했다’ 이상으로, 다시 결론을 짓자면, 정창원의 신라금은 신라인들이 제작한 현악기 유물로써, 일본 화금(和琴)의 생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악기다. 이것을 가야금으로 인식한 기존 학설의 문제점에 대해 김 교수는 신라토우에 대한 편년이나 고고학적 연구, 인접 학문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들었다.
“학자들이 사료를 폭넓게 종합적으로 고찰하지 않고 합리적인 해석 또한 부족했습니다. 이러한 편견으로 실체도 없는 가야금이 지금까지 부각되다보니 신라금이 사장되었었지요. 신라의 음악 문화가 평가 절하된 것입니다. 가야금과 가야음악에 가려지는 왜곡된 결과를 초래했고요. 단지 악기의 명칭에 대한 문제 제기이지만 정창원 신라금을 신라인이 전해준 가야금이라는 잘못된 역사를 적어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