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가까워지면서 인사치레를 해야 할 분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하면서도 소위 ‘김영란 법’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에 문득 생각나는 한 인물이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정붕(鄭鵬, 1467-1512)은 천성이 매우 강직하여 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당시 임금인 중종은 정붕을 가까이 두려 했다. 하지만 그는 거듭 높은 자리를 마다하다가 마지못해 한가한 벼슬인 청송부사로 내려갔다. 정붕이 고을을 잘 다스리고 있던 어느 날 평소 절친했던 좌의정 성희안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청송의 특산물인 잣과 꿀을 보내 줄 수 있겠나?”
그는 편지를 읽고 이렇게 답장을 써 보냈다.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백성의 집 벌통 속에 있는데 제가 무슨 재주로 그것을 구해 드리겠습니까?”
정붕의 편지를 읽은 성희안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바로 잘못을 사죄하는 글을 보냈다. 하지만 정붕은 성희안의 편지를 받은 그날 부사 직무를 내놓고 바로 시골로 내려 가버렸다.
당시로는 별것 아닌 청탁을 거절하고 미련 없이 벼슬을 던졌던 것이다. 정붕 그분은 오래 전 김영란 법을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관리가 정붕과 같은 태도를 갖게 되는 그런 날이 반드시 오리라 굳게 믿어본다.
서악동 4기의 고분군에 대해 강인구는 김정희의 주장을 수정해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진지왕릉, 4호분은 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 즉 문흥대왕릉으로 비정했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왕력」 및 「기이」편의 관련 기록이 비슷하다는데 착안해 1-3호분을 각각 위와 같이 추정하고, 4호분은 무열왕대에 문흥왕으로 추봉된 무열왕의 아버지인 김용춘의 묘로 추정해 이 일대를 무열왕 직계의 능역으로 규정했다.
이 4기의 고분군에 대한 사료를 살펴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법흥왕과 진흥왕의 장지를 애공사 북봉이라고 했고, 진지왕과 무열왕은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서 법흥왕릉과 진지왕릉은 애공사의 북쪽에 있다고 하고, 「기이」에서는 무열왕은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법흥왕릉 · 진흥왕릉 · 진지왕릉 · 무열왕릉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애공사와 영경사를 찾아야 한다.
현재 애공사는 효현동 삼층석탑이 있는 외외마을의 절터로, 영경사는 서악동 삼층석탑 부근의 절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애공사와 영경사는 법흥왕릉 · 진흥왕릉 · 진지왕릉의 남쪽에, 무열왕릉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애공사지와 영경사지로 알려진 곳은 이들 왕릉과 관련이 없거나 선도산 너머 반대편에 있어 두 사서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이근직은 애공사와 영경사는 같은 사찰이고, 능남마을(현재 능의 남쪽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서쪽에 2006년 4월 지표조사에서 많은 와편과 무문전(無紋塼)이 수습된 유적지를 애공사 또는 영경사지로 추정하였다. 이 절터를 기준으로 무열왕릉은 동북 방향이고 4기의 대형분은 북쪽이 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에 이근직은 1호분은 진지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법흥왕비인 보도부인, 4호분은 법흥왕릉으로 보고 있다.
3호분과 4호분을 각각 보도부인릉과 법흥왕릉으로 본 이유는 이전의 묘제인 적석목곽분으로 합장이 불가능했거나 석실분이지만 이전의 예에 따라 합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나, 진지왕과 진흥왕릉의 경우에는 석실분이 일반화 되어 왕비와의 합장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에 ‘흥덕왕이 왕비 장화부인과 합장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합장에 관한 문헌 기록이 없고 왕후의 능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혁거세와 함께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은 있으나 왕후의 장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3호분을 법흥왕의 왕비인 보도부인의 능으로 추정하는 이근직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필자는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진지왕릉, 4호분은 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 즉 문흥대왕릉으로 비정한 강인구의 주장이 더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