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콜라 병
-신동집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빈 콜라 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병은
빈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音樂)이
빈 콜라 병을 다스리고 있다.
-빈 콜라병을 통한 존재론적 역설
가을 들녘과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을 들라면 나는 빈 페트병을 꼽고 싶다. 오늘 아침 아파트 입구에도 플라스틱 커피 컵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흔적을 그리 남기고 싶어하는 걸까? 일찍이 이런 버린 것, 빈 것에 대해 탐구한 이가 있다.
신동집의 원명은 동집(東集)인데 필명은 눈동자를 집중하다, 사물을 깊이 있게 본다는 뜻의 동집(瞳集)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그만큼 그는 존재론의 세계에 천착했다. 이 작품은 그런 노정 속에 있는 것으로 사물의 내면과 즉물성을 통한 존재탐구의 세계를 한국시에 새롭게 열어 보인 시다.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넘어진 빈 콜라 병이 당당하게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본다. 빈 콜라병은 스스로 존재한다. 한 송이 들국화가 스스로 피어 있듯. 그런 점에서 자연물이건 인공물이건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한다. 산야의 자연에서만 서정의 기미를 익혀왔던 한국시에 경악을 줄 만한 작품이 아닌가? 이 병은 콜라를 넣기 위한 도구로서의 병이 아니다. 오히려 텅 비었을 때, “넘어진 빈 콜라병은” 더욱 자율적으로 자기를 주장한다. 빈 콜라 병에는 콜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빈 콜라’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때 ‘없는 것’도 분명히 하나의 ‘있는 것’이 된다. 빈 콜라병의 존재가 역설적인 시적 기법으로 표현된다.
‘콜라병에 가득히 들어 있는 빈 콜라’는 동양의 무(無)의 존재성이라는 사고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점에서 서구적인 감각과 동양적 예지와의 조화로운 결합으로 빚어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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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