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어느 사찰에서는 연고자가 현지에 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명복을 비는 의식을 유족들에게 생중계하기도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후손들은 참 편리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입맛이 쓰다. 산길을 걷다보면 허물어진 묘를 자주 보게 된다. 최근 몇 년 사이 무연고 묘가 더욱 늘어난 것 같다. 수 년, 수 십 년 사이에 이런 무연고 묘가 부쩍 늘어났으니 천 년 여의 세월이 흐른 옛 신라 능묘의 주인을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무열왕릉 바로 뒤편 구릉에 있는 사적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는 4개의 대형 무덤도 그 주인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이 무덤들은 경주 시내 평지에 분포하는 대형 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렸다. 누구의 무덤들인지 알 수 없으나 무열왕릉의 위에 위치하고 있고 대형인 것으로 보아 왕이나 왕족의 무덤일 것이다. 봉분의 높이는 10m 남짓하고 밑둘레는 110~140m에 달하는 비교적 큰 무덤들이지만 경주시의 중심부에 있는 평지 고분들과는 다르게 구릉지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구조 역시 적석목곽분과는 달리 무덤 내부를 돌로 쌓아 공간을 마련하고 주검을 넣은 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북쪽 선도산 산록에는 진흥왕릉(眞興王陵), 진지왕릉(眞智王陵), 문성왕릉(文聖王陵), 헌안왕릉(憲安王陵)이 있다. 또 동편으로 길게 뻗는 능선들과 남편의 대구-경주간 국도가 통과하는 소태고개의 좌우 능선들에도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소태고개의 동편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능선을 장산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의 남쪽 하단부에는 장산 토우총(土偶塚)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계곡을 건너 약 2Km 떨어진 곳에 법흥왕릉(法興王陵)이 있다. 그러나 이 주위에 있는 왕릉들은 무열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피장자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무열왕릉 뒤의 선도산에서 동쪽으로 향한 능선을 따라 분포하는 이 4기의 대형고분들을 서악동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위에서부터 1·2·3·4호분으로 구분하고 있다. 1호분은 높이 8m, 직경 39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의 1.7m 높이에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가 돌려져 있다. 2호분은 높이 8m, 직경 40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3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3호분은 높이 12m, 직경 60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1.5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보인다. 4호분은 높이 10m, 직경 50.9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자락 2m 높이에서 경사지게 세워진 자연석이 있다. 이 4기의 고분군은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으로 무덤 형식이 바뀌면서 신라의 왕릉이 산으로 이동한 것이 인정되는 점, 돌방무덤을 채용하면서 왕릉의 규모가 보다 축소되었으나 경주를 비롯한 주변지역에 남아 있는 대형분들 가운데 이 고분들이 최대형분에 해당한다는 점 등으로 보아 현재 이 주위에서 왕릉으로 전해지는 것들보다는 이 무덤들이 왕릉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 고분들의 위치가 무열왕릉 바로 뒤쪽으로 상하 일렬을 이루고 있는 점, 풍수지리에 합당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점 등을 들어 단순한 왕릉이 아니라 무열왕의 직계조상 왕들의 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조선 순조 때의 추사 김정희는 그의 추사집에서 『진흥왕릉고(眞興王陵攷)』라는 글을 통해 이들을 법흥왕릉, 진흥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으로 추정하였다. 그는 『동경잡기』 ‘능묘’조에 진흥왕릉이 서악동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1호분을 진흥왕릉으로, 무열왕릉과 진지왕릉이 영경사 북쪽에 있다는 기록에 의해 동일한 공간에 두 왕릉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하고 2호분을 진지왕릉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3호분과 4호분을 각각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으로 추정하였는데 이는 두 왕릉이 모두 공작지에 있다는 ‘능묘’조의 기록과 경주 사람들에게 전해오던 서악동의 별칭인 산작지에 주목하고 공작지와 산작지를 동일한 지역으로 생각하여 이렇게 추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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