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보문리 손곡동(蓀谷洞)에는 조선후기 학행과 효행으로 이름난 처사문인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1699~1770)이 지은 종오정(從吾亭)이 있다. 당시 숙종의 환국과 영조의 노론일당 전제정치로 정치는 혼란하여 세속은 이(利)에 묻혀 의(義)가 상실되어가고, 학문은 외양에만 치우치고 정치세력과 가까워져서 학문의 본질이 흐렸다. 이때에 최치덕은 시대의 고민을 안고 평생을 주자학과 예학을 익히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조용한 곳에 은거하여 살아간다. 스스로 ‘자희(自喜)’라 호를 짓고 자신의 즐거움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 세상일에 대해 아는 척 하지 않는다. 당시 과거제도와 혼란한 정치 상황에 대한 표현으로 그는 벼슬을 포기하고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다. 둘째 선조의 묘를 돌보는 즐거움으로 효를 실천하며 조상을 극진히 섬겨 지역 문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셋째 자연을 벗 삼아 처사로써 평생을 사는 것이다.
종오정이 자리한 곳은 ‘지금까지 한 골짜기의 기이하고 깊숙한 자연에 숨겨져 있었다. 예부터 전하는 칠보(七寶)로 불리는 조개껍질 덮인 만호봉(㻴瑚峰[경주 토함산])이 상접하고, 동쪽 골짝은 동으로 확 트여 멀리 푸른 바다의 운기(雲氣)를 누르고 산세는 서쪽으로 꽉 막혀 성시(城市)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종오정상량문(從吾亭上樑文) 가운데」]’곳으로 산수를 벗 삼아 은거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율수문(聿修門)을 따라 들어서면 정면에 귀산서사(龜山書社)·모고암(慕古菴), 왼쪽에는 종오정, 오른편에는 일성재(日省齋)가 자리한다. 종오정 뒤로는 1954년 건립된 최치덕의 위패를 모신 진덕묘(進德廟)가 배치되어있다. 특히 철자(凸字) 형태의 연당은 종오정을 중심으로 앞면 좌우에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심겨져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 낮은 지역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지의 기능도 갖추었다.
건립과정을 보면, 1745년(영조21)에 돌아가신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일성재를 지었고 그의 명성을 듣고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배우길 청하였으나 장소가 좁아 논의 끝에 1746년 일성재 옆에 모고암을 지었다. 1747년에는 연당(蓮塘)을 파고 종오정을 지어 강학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종오정은 정당(正堂) 종오정, 서당(西堂) 지간헌(持竿軒), 동당(東堂) 무송와(撫松窩) 등 3칸으로 구성되며, 그가 남긴 『자희옹선생문집』 권2에는 「종오정명(從吾亭銘)」·「무송와명(撫松窩銘)」·「지간헌명(持竿軒銘)」등이 있다.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종오정중수상량문」에서 撫松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사모하는 슬픔에서 지은 것이고 持竿은 많은 책을 쌓아둔 별관이란 뜻을 갖는다고 풀이하였다. 또 『논어』 “부귀함을 가히 구할진댄 비록 채찍을 잡는 선비라도 내 또한 하겠지만 만약 가히 구하지 못할진댄 내 좋아하는 바를 따르리라.(『論語』「述而篇」,“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에서 ‘從吾’의 뜻을 취하였다.
이렇듯 종오정은 부모와 관련된 건축물이자 독서하며 강학하는 곳으로 그는 이곳에서 단순 경치만 즐긴 것이 아니라 속세를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관조(觀照)의 세계로 몰입하고자 하는 선비의 정신세계를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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