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은 실패의 핑계가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성공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유대인의 성공비결은 이 ‘부족(lack)’함에 있다” 이스라엘 ‘창의융합형 글로벌인재 육성의 대가’인 헤츠키 아리엘리(Hezki Arieli)의 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 가장 부족하고 불리한 나라가 신라였다. 지역이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외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북으로 고구려, 서로는 백제, 남으로는 가야제국, 동으로는 왜가 에워싸고 있어 이들의 침입에 대비를 해야 했다. 유대인이 성공한 것이 부족함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리한 환경 때문에 역설적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신라가 외세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하고 그것도 불완전한 통일로 광활한 만주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한 학자 중 원조가 단재 신채호이다. 그는 저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다른 종족을 불러들여 동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이어 신채호는 김춘추를 사대주의자, 김유신은 간사한 장수라 폄훼하고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우리의 영토가 줄었다며 신라에 의한 통일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사이에 동족의식이 있었을까?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도 당이나 왜 등과 마찬가지로 적국이었다. 이런 생각은 고구려와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단재 이후 일부 재야 사학자들도 신라의 삼국통일 의의를 깎아내리고 있다. 특히 신라가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고 수차에 걸쳐 조공을 하고 처음에는 독립적 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연호를 없앴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역사의 정통성은 신라가 아닌 고구려와 발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 통일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만 차지하게 되어 발해가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되었다고 믿고 있다. 발해가 없다고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있으나 발해를 놓고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신라국왕의 황제적 위상’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광개토대왕이 재위 9년 봄 정월에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또 안원왕 때에도 “동위에서 조서를 내려 왕에게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전과 같게 했다.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도 중국에 조공을 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모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 왜와 활발한 교역을 했으며, 상호간 조공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조공의 의미는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예물 등을 바치는 것’이라기보다는 국가 생존차원에서의 교역이란 뜻이 더 정확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신라가 중국에 사대를 한 것처럼 보고 있다. 또, 신라가 독자적 연호를 쓰다가 없앴다고 하지만, 사실 삼국 중 독자적 연호를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나라는 신라였다. 신라는 무려 114년간 7개의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고구려는 5개의 연호를 사용했으나, 광개토대왕 때 사용했던 ‘영락’이란 연호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 어렵다. 백제는 확실하게 밝혀진 연호가 아직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라는 황제국가로서의 위상을 지녔었다.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춘추공’조에서 신라인들이 당시를 ‘성대(聖代)’라고 한 것은 신라를 이상국가로 일컬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태종은 황제의 시호였다. 이때 당에서 이 시호를 폐지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신라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황복사금동사리함 명문에서는 효소왕의 어머니를 ‘신목태후’라고 표현하였다. 왕 스스로 ‘짐(朕)’이라 했고 왕의 죽음을 ‘붕(崩)이라 했다. 모두 황후와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또 김 연구원은 “신라 국왕이 주변국을 제후국에 봉했다”며 “탐라국을 속국으로 조공을 받았고 고구려의 귀족 출신 안승을 고구려왕(뒤에 보덕국왕)으로 책봉하고 표문을 받았으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자 그를 대아찬에 책봉함으로써 탐라와 보덕국과 발해를 번국으로 설정하고 그 우두머리를 제후에 임명했다”고 밝혔다. 이는 신라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넓은 민주까지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가 되었으리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즉 역사란 상상과 추측의 학문이 아니고, 해석과 고증의 학문이다. 해서는 안 되는 가정으로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까지 민족국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는 한때 중원을 차지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들 민족은 어떻게 되었나?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의식을 가진 민족 집단이 생기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역사적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가 확보한 한반도란 공간은 민족의 생존 터전이 되고 신라어는 한국어의 원형이 되었으며, 신라의 문화가 한국인의 현재의 삶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다. 따라서 신라가 민족사의 정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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