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미래에는 병원의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다를 거란다. 바늘이 없어 아프지 않는 주사는 이제 상용화 단계에 와 있고,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줄여서 VR) 헤드셋으로는 몸의 통증을 완화하는데 쓰일 의료기구가 될 전망이란다. 주사 맞는 과정이 더 이상 피하고 싶은 부정적인 경험으로 각인되지 않게 가상현실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3D 안경과 헤드셋이 좋은 의료기기가 될 수 있다니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하나둘 현실이 되는 모양이다. 주사 맞는 게 즐거운 사람은 없다. 단언컨대 그런 이상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내 아들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아기 때는 궁뎅이에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면 그 정의(!)되지 않은 고통만큼이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애 엄마 얼굴도…. 그러다 좀 더 크니까 병원만 가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만 보면, 자지러지게 울어댄다. 병원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목 놓아 울었더니 정작 주사 맞을 때는 이미 폭풍은 그쳤는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한다. 그랬던 녀석이 이젠 제법 의젓해졌지만 아직도 주사를 든 간호사 누나를 예의주시하는 긴장감은 놓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병원은 아픈 주사를 맞는 곳이라는 사실이 몸에 각인(刻印)된다. 그 고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애 엄마는 애가 주사를 맞을라 치면 머리를 반대로 돌려 주사 맞는 걸 못 보게 한다. 그런데 이게 개선의 여지가 있는 행동이란다. 주사를 맞을 때 환자가 고개를 돌리면 뇌가 모든 통증 신호를 혼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통증 강도는 오히려 커진다고 한다. 반면에 주사 맞는 것을 눈으로 봄으로써 통증이 생기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면 뇌는 그 부분의 통증 신호만 처리하게 되니 결과적으로 덜 아프다는 것이다. 고통을 눈이나 뇌 등 다양한 기관으로 나누면 나눌수록 덜 아프게 되는 원리다. 고통을 직시하게끔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고도의 과학체계를 우리 고참은 우째 알았을까? 필자가 군대에 있을 때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신병으로 갓 자대에 배치를 받으니 모든 게 낯설고 하는 행동마다 어설프다. 점심시간이 되어 누가 떠놓은 밥을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터졌다. 선임자 중에 가장 꼴통(!)인 선임자의 숟가락을 누군가 가져간 모양이다. 지금도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는지 도통 이해는 안 되지만, 본인 숟가락을 찾느라 미쳐 날뛰던 고참이 바로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랬다. 분신과도 같은 그 숟가락으로 밥을 먹은 범인은 본의 아니게 바로 나였다. 고문관(?)의 등장은 이렇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가 보다. 그저 숟가락으로 밥 먹은 죄밖에 없는 나는 내무반으로 호출된다. 거기에는 나와 본인 숟가락을 정말 아끼는 선임, 둘 뿐이다. 갑자기 눈을 감으란다. ‘아, 군 생활이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어디서 어떤 방향으로 주먹이 나올지 도통 예측이 안 되니 정말이지 미치겠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나를 압도했다. 그저 눈만 감았을 뿐인데 아, 이래서 IS 같은 무장단체는 잡은 인질에게 두건을 씌우는 걸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건 고도의 심리전이다. 다들 총 쏘고 격파 뭐 이런 걸 군대에서 배운다는데 필자는 아무리 큰 고통일지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면 덜 아프다는 고등 심리학을 그때 터득했다. 어쨌거나 주사로 인해 생기는 공포감을 가상현실로 완화시킬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뉴스다. 과정은 이렇다. 주사가 무서운 환자가 고글이 달린 헤드셋을 쓴다. 그러면 눈에 실제 팔과 거의 같은 위치에 가상의 팔이 보인다. 두 개의 다른 팔이다. 하지만 그 가짜 팔과 실제 팔에 동일한 열을 가하거나 하는 식으로 자극을 주다 보면 환자는 점점 가짜 팔과 자신의 팔을 혼동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흥미로운 단계를 거치면서 가상의 팔이 실제 자신의 팔로 느끼게 되고 가상의 팔, 아니 자신의 팔에 주사를 놓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이것이 학습이 되어 어느새 주사에 대한 공포감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기계의 도움 없이 인간이 과연 홀로 존재할 수 있을까 점점 두려워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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