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던져주시고 들에다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그리워할 것입니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 저리 헤맬 것입니다. -가을날 떠올려 보는 두 가지 정서 들판은 그야말로 순금이다. 논둑에 서면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벼이삭, 그 자잘한 순금 덩어리들이 영락(瓔珞)처럼 찰랑이며 맑은 그늘을 흩뿌린다. 우리 맘과 몸을 점령하고 있는 가을 속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숙연해지게 된다. 잊었던 사람이 새삼 그리워지고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도 떠올린다. 이럴 때마다 꺼내 읊조리는 기도문 같은 시가 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치열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러나 “This was very big summer”의 우리말 번역은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이다. ‘big’이라는 낱말과 ‘위대하다’ 사이에 언뜻 보이는 위화감. 그러나 이는 절대자를 향한 겸허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기원과 간구가 깃들여지는 맥락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하루가 다르게 감과 대추는 떫은 맛을 빼내고 있다. 포도와 사과, 석류도 마지막 햇살을 빨아들여 감미로움을 완성하느라 분주하다. 어릴 적 어머니는 그것을 “열매들이 맛을 내려고 소곤댄다”고 하셨다. 그 과물을 보며 며칠만 더 햇볕을 달라는 기도를 보태는 계절이다. 이런 계절의 풍요에 대비되는 인간의 불안한 내면도 이 시는 짚어준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집을 꼭 거주의 공간에만 한정하여 볼 필요는 없으리라. 거기에는 뭔가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빈 손바닥만 남은 내면을 바라보는 쓸쓸한 심사도, 주변부에서 서성이는 존재들의 쓰라림도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그러나 피하지 말아야 한다. 불면의 밤을 보내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보내야 한다. 더 철저하게 가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더 아래로 내려가 자신과 대면해야 그 거름으로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있기에. 감미롭게 익어가는 과일과 이에 대비되는 허전한 내면, ‘가을날’ 떠올려보는 두 가지 정서요 풍경이다. ------------------------------------------------------------------------ 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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