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릉 앞 비각 안에는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 태종무열왕릉비가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는 무열왕이 661년에 서거했으므로, 이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능비가 이전의 신라왕릉에는 보이지 않던 것으로 이는 왕릉의 축조 및 능묘배치에 처음으로 당의 제도가 도입된 것을 의미한다. 이후 30대 문무왕, 33대 성덕왕, 42대 흥덕왕에서 능비가 확인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이 비와 관련하여 조위(曺偉 1454-1503)의 시가 기록되어 있다. “… 끊어진 비석이 거친 풀 속에 누웠는데 높이 쳐든 귀부(龜趺)가 보이네. … 이것이 무열왕릉 … 비문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이지러진 글자 많아 알아보기 어렵구나. …” 이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당시에 마모된 글자가 많았지만 온전한 형태의 비석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암으로 만든 귀부는 머리가 서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길이 약 3.33미터, 폭 2.54미터이다. 귀부는 장방형의 받침석 위에 얹혀 있다.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과감한 기상을 보여주면서도 표정은 엄격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비좌(碑座)는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귀갑은 4중의 육각형 귀갑문이 새겨져 있다. 거북이의 앞발가락이 다섯이고 뒷발가락은 넷인데, 이는 거북이가 힘차게 나갈 때 뒷발의 엄지발가락이 안으로 밀려들어간 것을 표현한 것이다. 또 거북이가 힘을 줄 때 턱밑이 붉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석의 붉은 부분을 거북이의 턱으로 삼았다. 거북의 등에 새겨진 구름무늬와 당초문, 보상화문, 머리와 목의 주름 그리고 입김과 콧김까지 표현하는 등 조각의 치밀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수(螭首)의 높이 약 1.1미터인데,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좌우 3마리의 용이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고 전체적으로는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용의 다리와 비늘 하나하나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어 당시 석조 예술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중앙에는 전서체로 ‘太宗武烈王之碑’라는 2행 8자가 양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서화가인 이우(李俁)의 『대동금석서속(大東金石書續)』에 의하면 비문의 글을 당대의 명필이며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의 썼다고 한다. 이 명문으로 무열왕릉은 신라 역대 능묘 중에서 피장자가 확실한 유일한 능이 되었다. 따라서 무열왕의 능묘를 기준으로 삼국 및 통일신라 왕릉의 형식을 구분한다. 일부에서는 이수와 귀부가 다른 재질의 암석으로 조성되어 제작 시기가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 비석의 비편이 부근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으나 극히 일부 조각에 지나지 않아 그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없어 아쉽다. 귀부의 네 모퉁이에는 초석이 남아 있어 당초에도 비각(碑閣)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귀부와 이수는 비록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 정교함과 화려함에 있어서 당의 조각품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20세기 위대한 건축가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미즈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는 “신은 디테일 속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고 하였다. 이 귀부와 이수의 조각 솜씨는 한마디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비석을 만든 장인은 신라 최고 불교 예술인 양지(良志)스님이 아닐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영묘사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각과 탑의 기와, 사천왕사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을 모두 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영묘사와 법림사 현판도 그가 썼다고 한다. 당시 그는 신라 최고의 예술가로 이 태종무열왕릉비도 그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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