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경주시 동천동에서 한문서당(일신서당&고전번역원)을 운영하며 한문학을 공부중이다. 늘 컴퓨터와 고서 등을 가까이하며 하나의 연구주제를 마음에 두고 자료를 뒤지며 하루를 보낸다. 하나의 연구과제가 끝나면 또 다른 연구주제로 넘어가는데, 이렇게 연구자로 살아 온지가 벌써 5년째다. 주로 조선후기의 한시와 유람기행문 등을 연구 중이며, 작년부터는 경주의 한문학으로 관심을 돌려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최근에는 경주에서 일어난 향전(鄕戰)에 관심을 갖고 1725년 인산서원을 둘러싼 지방과 서울의 관계에 대해 고민 중이다. 조선의 경주는 유학의 본거지로, 유수의 학자들이 향촌을 기반으로 중앙정계와 각계각층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신라의 명맥을 이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그 기반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 조선의 경주를 알려면 향촌기반세력의 이해가 먼저다. 또 역사를 보는 관점은 안과 밖의 공간적 시각이 존재한다. 내부에서 밖을 바라보면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상당한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사화와 당쟁 역시 안팎의 시각적 차이가 있기에 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경주를 알려면 당시 국내의 상황과 나아가 동아시아·세계사 등 폭넓은 안목이 지대적이며, 세계사의 흐름 속에 신라와 중국의 당나라, 고려와 중국의 송나라, 조선과 중국의 명청시대 등 역사의 흐름 속 경주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1725년 경주부에서 일어난 을사사화(계림사화)는 단순 경주의 유림(남인과 노론의 격돌)간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조정의 혼란한 정치상황과 사색당파 간 자신들의 이익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다툼 속에 경주도 있었다. 조정의 명으로 경주부윤으로 오는 자의 당색이 어떠한 가에 따라 엇갈린 평가와 시비가 일어났다. 또 조선시대 남산에서 생산된 수정으로 안경을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1636년 경주부윤 민기(閔機. 재임기간1636. 4~1637. 6)가 수정안경을 착용했고, 이것이 집안대대로 소중하게 대물림됐다. 경주남석이라 불린 수정안경은 품질이 좋아 어둡던 눈이 밝아지고, 침침하던 것이 환하게 보였으니, 글을 보는 선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물건으로 조선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또한 안경의 등장으로 학자들의 공부시간이 더욱 길어졌고, 눈이 나빠 보지 못하던 것을 수정안경의 도움으로 예전보다 더 학문에 매진했으니, 경주남산 수정안경의 등장이 학문의 발전까지 가져왔다. 한문학의 범위는 인문·문화·예술·과학 등 참으로 광범위하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바라본 경주의 모습 역시 경주 한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경주를 오가며 시문을 남겼고, 이것이 당시를 들여다보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18세기 담헌 홍대용(1731~1783)은 학자이자, 과학자, 수학자로 많이 알려졌다. 그는 을병연행록을 통해서 청나라의 신문물을 기록하였고, 조선으로 유입해 사회의 변화를 꾀하였으며, 후학들에게 실학사상이라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주 박종(1739~1793)은 국내의 명승지를 두루 탐승하였는데, 1767년 경주를 찾아 경주의 곳곳을 유람하고 많은 시문을 남겨 당시 경주의 모습과 신라십무 등 다양한 문화를 글로 남겼다. 홍대용과 박종은 동시대 학자였으나, 활동 영역은 달랐다. 하지만 동일한 시대와 흐름 속에서 국내외로 다니면서 조선의 문화에 이바지한 공이 서로 크다. 이처럼 한문학은 한자로 기록된 총제적 학문으로, 사회 모든 현상을 담는다. 경주는 신라문화가 지배적인 곳이다. 고려와 조선 등의 경주는 문학적으로 그동안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앞으로 격주로 연재할 내용과 게재방향은 다음과 같다. 경주학의 범주 가운데 조선시대 경주의 전반적인 모습이 포함된 인문학을 다룰 예정이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서 경주가 차지한 비중과 인물 그리고 사건 등 중요하게 다룰 내용들이 많다. 특히 조철제 선생이 연구집필한 『경주문집해제』에는 저자별 284종, 서명별 286종의 인물과 문집류의 경주학 자료는 거의 수록되어있다. 1년에 두 명씩 인물만 연구해도 거의 150여 년이 걸린다. 필자는 한문학전공을 살려서 문헌자료의 고증과 이를 바탕으로 재해석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며, 문화유적과 유물 그리고 인물을 대상으로 당시의 시대상황 등과 연관지어 다각도로 살펴볼 예정이다. 그 가운데 경주에 소재한 원사정재(院祠亭齋)와 그 인물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경주학문의 연원인 회재 이언적 선생(1491~1553)과 임란때 공을 세운 운암 최봉천(1564~1597)·정무공 최진립(1568~1636) 그리고 송국재 이순상(1659~1729)·매호 손덕승(1659~1725)·화계 류의건(1687~1760)·활산 남용만(1709~1784)·치암 남경희(1748~1812) 등 경주출신의 인물과 그들의 업적을 원사정재와 관련해서 다루고, 경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사회현상도 연계할 예정이다. 우선 손곡동에 위치한 종오정의 의미와 주인장 자희옹 최치덕(1699~1770)의 인물상과 그 가치 등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오니, 많은 기대 바란다. 지방자료의 가치는 세상 밖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경주라는 관광도시에 필요한 수많은 원전자료 등이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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