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학연구원에서 노세 우시조의 유리건판 사진을 조사한 것은 이제까지 굳게 닫혀있던 아스카엔 수장고를 열어 전인미답의 첫발을 디딘 쾌거로 평가된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가 오가와 세이요가 남긴 한국 문화재 사진은 우리나라 연구자가 속히 조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일본 슈지츠대학교 대학원 가종수 교수(賈鍾壽)의 말이다. 일본 나라시의 나라국립박물관 앞에는 1922년에 설립한 아스카엔(飛鳥園)이라는 문화재 사진 전문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당시 일본에서 손꼽을만큼 사진작가로 명성이 있던 오가와 세이요(小川晴暘, 1894-1960)가 설립한 것으로 약 100년째 우직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는 1920년대~1930년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촬영한 오가와 세이요의 유리건판 필름 10만여 점과 노세 우시조(能勢丑三, 1889~1954)가 우리나라를 드나들며 찍었던 유리건판(경주문화재에 관한 사진 다수)까지 소장해 보관하고 있다.
경주학연구원(원장 박임관, 이하 경주학硏)은 지난해 복제 촬영한 노세 우시조의 유리건판 흑백사진 700여 점 중 80여 점을 엄선 전시하고 그 전모를 국내에 최초로 공개한다.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전시실에서 이어질 ‘90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우리문화재’전에서 노세 우시조의 사진을 통해 90년 전 우리 문화재가 처한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
한편 경주학연구원은 아스카엔의 설립자 오가와 세이요의 작품과 촬영기록(야장, 촬영을 다니면서 기록한 일지), 스케치 그림, 책자 등 소장 자료 일체에 대한 2차 조사를 내년부터 3년간 진행하기로 합의하고 지난달 31일 경주에서 MOU를 체결하는 쾌거를 올렸다.
-MOU 체결하는 쾌거있기까지 문화재 사진전문회사 ‘아스카엔’과 슈지츠대학교 대학원 가종수 교수 역할 절대적
이번에 선보이는 사진들은 1920년대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직접 문화재들을 촬영한 ‘노세 우시조’라는 인물과 그 사진들이 사라질 위기에서 가치를 알아보고 보관해 온 일본 나라시 문화재 전문회사 ‘아스카엔’의 감동적인 스토리로 집약된다. 또 자칫 사장될뻔한 경주 유물사진들을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도 우리땅 경주에서 소개될 수 있도록 공을 들여온 경주학연구원의 공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공개 결정이 있기까지는 아스카엔의 오가와 고타로(小川光太郎) 현 사장의 경주시와 나라시 간의 친선우호 교류 증진과 사진의 고향인 경주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이 사업의 쾌거가 있기까지에는 일본 슈지츠대학교 대학원 가종수(賈鍾壽) 교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가종수 교수는 아스카엔에 일제강점기 촬영의 우리 문화재 사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이다.
그는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동지사대학교에 유학하면서 지도교수였던 오가와 고요(小川光暘, 아스카엔 설립자인 오가와 세이요의 차남) 교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오가와 교수는 동남아시아 석조문화재 조각상 연구를 하면서 아스카엔에 사진 심부름을 가 교수에게 시켰던 것. 사진의 전모를 본 적이 없지만 대략 어떠한 자료들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한국 관련자료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해 10여 년 전부터 국내에 아스카엔의 존재를 간간히 알려왔다.
-우리나라 사진은 극히 일부만 일본에서 알려졌을 뿐, 지금까지 미공개로 아스카엔 수장고에 잠들어 있어
아스카엔에는 “사진은 ‘기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 하는 것이란 철학으로 촬영 한다”는 신념으로 일본과 한반도(북한 포함), 중국(실크로드 포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누비며 남겨 놓은 유리건판 작품과 필름이 10만 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일본의 문화재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진은 극히 일부만 일본에서 알려졌을 뿐 지금까지 미공개로 자세한 목록조차 없이 아스카엔의 수장고에 잠들어있다.
특히 촬영을 다니면서 기록한 일지인 야장은 오가와 세이요 선생이 만난 사람과 촬영 당시의 상황 등을 친필로 고스란히 적고 있어 공개될 경우 사료적 가치가 크며, 사진작가 이전에 화가였던 그는 촬영현장의 생생한 장면을 그림으로도 남겨 놓아 이 또한 크게 기대되고 있다.
아스카엔의 자료가 미공개로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오가와 세이요가 일본 최고의 사진가로 황실의 명치(明治)천황 사진담당 주임이었던 마루기 도시요(丸木利陽)로부터 혹독한 사진 수업을 받은 영향이다.
사진 촬영 기술은 차치하고 남긴 작품을 유출하지 않기 위해 인화할 경우 뒷면에 ‘복사 불가’라는 붉은 색 도장을 일일이 찍어 두었기 때문이다. 유리원판도 그러한 이념으로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해협 건너 부산 거쳐 경주까지 와서 다시 짐꾼 채용하고, 오지의 황폐화된 유적지 찾아다니며 사진 찍어
프로 사진작가였던 오가와 세이요도 하루에 10~15장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겨우 1~2장만 쓸만한 사진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찍어 둔 것이 오늘 아스카엔의 소장품들이다. 10만 장 가운데 한반도 문화재 작품사진이 1만 장에서 2만 장 정도의 규모고 실크로드 돈황의 막고굴과 운강석굴 등 중국 사진도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스카엔에 보관된 ‘유리건판(瑠璃乾板, Gelatin dry plate)’은 120×163mm의 크기의 두께 1.3mm 유리판에 젤라틴 성분의 감광유제를 바른 후 건조시킨 사진 원판으로 셀룰로이드(플라스틱) 필름이 나오기 전에 사용되던 흑백사진 필름유제의 원형이다. 90년 전 카메라의 가치는 지금의 승용차보다 더 귀하고 비쌌을 뿐더러 유리건판도 구입비가 만만치 않았으며 사용하기도 무척 까다로웠다.
사진기(카메라)와 무거운 유리건판 필름을 큰 가방에 챙겨 일본에서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을 거쳐 경주까지 와서는 다시 짐꾼을 채용하고 오지의 황폐화된 유적지마다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사진 한 장을 찍는 일련의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웠다. 한 장의 사진에 깃든 노력은 바로 ‘지극한 정성’이었다.
-아스카엔 측, 경주학硏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아스카엔 사진사용 허가한 적 없어
이번 쾌거는 경주학硏이 지난 2014년부터 아스카엔 측과 협의를 진행하면서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의 정부기관과 공공연구기관에서 수차례 접촉하고 조사의향을 비추었지만 아스카엔의 굳게 닫힌 문을 열지 못했다. 아스카엔 현재 사장인 오가와 고타로는 오가와 세이요의 손자로 처음에는 국내의 조사 파트너로 넉넉한 재원이 있고 믿을 수 있는 국가기관을 선호했다. 그런 그가 결국 경주학硏에 빗장을 연 것은 그들의 높은 열정과 경주와 한국의 문화재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 후한 점수를 준 덕이었다.
이에 대해 아스카엔과 경주학硏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던 일본 슈지츠대학교 가종수 대학원 교수는 “아스카엔 사장이 경주학硏을 선택한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지만 꼭 홀린 것 같다”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열정이 서로 통한 것 같다고 전했다.
가 교수는 경주학硏의 열정을 높이 평가하면서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노세 우시조의 문화재 사진은 2016년 경주학연구원의 조사에 의해서 그 내용이 확인됐다”고 했다.
“노세 우시조의 사진은 아스카엔이 소장한 우리나라 문화재 사진 가운데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아스카엔의 오가와 고타로 현재 사장에 따르면, 아스카엔에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경주학연구원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의 아스카엔 사진사용을 허가한 적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