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대 왕은 모두 56분이다. 그 중에서 경기도 연천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55분의 왕과 왕비의 능은 경주지역에 조영되었을 것이다. 현재 경주지역에는 36왕의 능과 박혁거세 거서간의 왕비인 알령부인의 능이 확인되었거나 추정되고 있는데, 19왕의 능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어 온 신라 왕릉은 11기에 불과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사회적 변화인 족보의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 숭배 사상의 확대로 능묘를 중요시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730년 경주부윤인 김시형이 박씨 문중과 김씨 문중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시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능의 주인을 정하자며 타협을 했는데 그 결과 남산의 동쪽은 김씨 왕릉으로 하고 서쪽은 박씨 왕릉으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 17기의 주인공이 새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 이후 8기가 추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왕릉은 기록상의 위치나 시대적인 능의 형식과 차이가 있어 그 진위가 의문시 되고 있다. 그 중에서 능비가 있는 이곳 무열왕릉과 비편이 출토된 제42대 흥덕왕릉은 무덤의 주인이 확실하다. 이 외에 기록상의 위치와 시대적인 형식에 맞아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왕릉은 제27대 선덕여왕릉, 제30대 문무왕릉, 제33대 성덕왕릉, 제38대 원성왕릉, 제41대 헌덕왕릉 등 5기이다. 이 7기의 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왕릉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태종무열왕릉은 해발 380m인 선도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나온 능선의 동쪽 경사진 면에 일렬로 나란히 배치된 5기의 대형 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능 앞으로는 서악들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서천이 흐르고 있어 풍수상으로는 배산임수지형이다. 능의 규모는 높이 약 13m, 둘레는 약112m이고, 구조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분 아랫부분에는 봉분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연석으로 된 호석을 둘렀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능묘에는 잘 다듬은 돌로 호석을 돌리고 여기에 십이지상을 배치하고 돌로 난간을 돌리고 있다. 태종무열왕릉의 호석 구조는 자연석으로 된 호석을 몇 단 안으로 들여쌓은 후 높이 약1m, 너비 약 0.4m 정도의 괴석을 기대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능에서 호석의 받침석이 군데군데 확인 되는데, 봉분자락 위로 노출된 것은 10여 개 정도이다. 고 이근직 교수는 그의 저서 『신라왕릉 연구』에서 노출된 받침석 가운데 최소거리가 0.8m 내외이고 받침석의 너비가 약 0.4m, 봉분 둘레가 약 112m인 점을 감안하여 90여 개가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신라왕릉에서 이와 같이 호석 외부에 받침석이 설치된 것은 태종무열왕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왕릉 앞에는 화강암재 장대석 8매로 배례석을 마련하고 있다. 전체 크기가 장축 304cm, 폭 214cm, 두께 35cm이나 조립 형태와 장대석 모양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당대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태종무열왕릉 안으로 들어서서 비각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 배례석이 정면으로 보이는 지점에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 두 그루가 한데 붙어 있는 연리목이 있다. 왼쪽이 팽나무이고 오른쪽은 말채나무이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줄기가 이어져 한 나무로 자라는 현상을 연리목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같은 종류의 나무끼리 붙어있고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종의 나무가 연리목을 형성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나무껍질의 색깔이 밝고 표면이 매끄러운 나무가 팽나무이고 이에 비해 껍질이 검고 거친 나무가 말채나무이다. 말채나무는 봄이 되어 한창 물이 오를 때 새로 나오는 가느다란 가지가 말채찍으로 쓰기에 적당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팽나무는 대나무로 만든 딱총에 둥글고 단단한 이 나무 열매를 넣고 쏘면 팽 소리가 난다고 해서 팽나무라고 한다. 필자가 어릴 때는 팽나무를 포고나무라고 했다. 이 두 나무는 밑둥으로부터 약 60cm 가량 붙어 있는데 그 위로는 각각 분리된 개체로 자라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인 김춘추와 문희에 얽힌 설화를 일깨워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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