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무렵 -서숙희 풀벌레 울음소리 옥양목의 가위질 같다 차가운 별빛은 물에 씻어 박은 듯 잊고 산 세상일들이 오린 듯이 또렷하다. -풀벌레 울음에서 끌어낸 세상의 밑그림 포스터라는 작곡가가 있었다. 그는 가을이면 우리에게 「기러기」(원곡 「주인은 찬 땅 속에」)라는 노래로 다가왔다. “달 밝은 가을밤에/기러기들이/찬 서리 맞으면서/어디로들 가나요” 그 노래를 부르며 우리들 청춘은 가을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그건 깊은 가을의 노래다. 이즈음의 일기로는 아직 그 심정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처서 지난 지 며칠. 대낮엔 삼십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 전기톱날 소리 같은 말매미들의 울음이 아직 기승을 부리지만, 계절은 속일 수 없는 것. 아침 저녁으론 온갖 가을 풀벌레 울음소리가 제법 자욱하다. 찌르르 찌르르르 우는 귀뚜라미에서부터, 맑고도 가는 방울을 딸랑이듯 우는 방울벌레, 큰 구슬을 굴리는 듯한 긴꼬리 같은 곤충들이 맑은 공기에 부딪혀 온 천지에 울려퍼지는 그 울음소릴 듣고 생각에 잠기지 않는 이가 있을까. 첫행(초장) “풀벌레 울음소리 옥양목의 가위질 같다”는 참 기억에 오래 남는 구절이다. 옥양목(玉洋木)은 생목보다 발이 고운 무명으로 빛이 희고 얇은 베다. 그 보얀 베에 환한 스테인레스 가위, 잘 드는 날이 건너간다. 그 때 연상되는 맑고도 가벼운 “풀벌레 울음소리”. 아마 쓰으쓰으, 샥샥 가는 베 짜는 울음을 가진 중베짱이 소리를 연상하고 썼을 법한 이 구절은 개성적이면서도 돌올하다. 90년대 이후 우리 시조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 촉진적인 구절이 아닌가 한다. 거기에 그치지 아니한다. “옥양목의 가위질”이라는 바느질과 관련된 감각은 다음 행(“박은 듯”), 또 다음 행(“오린 듯”)까지 이어진다. 그러면서 2,3행(중장, 종장)은 공간과 배경이 확연히 구별된다. 이 진폭이 이 시의 강점이다. 2행의 공간은 밤하늘이다. 하늘이 높아지는 계절 가을. 별들은 또렷하기 그지없다. 그것을 시인은 “차가운 별빛은 물에 씻어 박은 듯”이라 표현한다. 감각이 이렇게 광대해졌다. 그렇다. 하늘의 별들도 넓은 공간 속에 제 자리를 잡고 저마다 “박은 듯” 존재를 빛내고 있는 거다. 그 구절이 3행을 이끌어낸다. 말하자면 수직이 수평을 끌어낸 셈이다. 3행은 세속의 일로 내려온다. 하늘의 별들이 지상의 사람살이로 이어진다. “잊고 산 세상일들이 오린 듯이 또렷하다.” 하늘의 별처럼 박혀 살고 있는, 잊고 살았던 이웃의 삶이 선명히(“오린 듯”) 들어온다. 바야흐로 ‘문리’가 트인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소월과 같이 자책하면서 시적 화자는 나의 이웃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더위에 시달리던 여름엔 보이지 않다가 풀벌레소리가 불러낸 것이다. 결국 온갖 세목을 생략한 단수의 이 시조는 서정이 서사를 끌고 가는 구조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풀벌레 울음은 그 울음이 향하는 먼 곳, 하늘로 시선을 향하게 하고 그 시야는 세상사의 이치를 떠올리게 한다. 풀벌레 울음 하나에서 촉발한 이 시는 그만큼 큰 스케일을 갖고 있다. 그것을 바느질 용어로 엮어낸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시인의 언어와 안목이 돋보이는 가편이다. ---------------------------------------------------------------------- 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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