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의 생장 한계선이 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열악한 조건에서는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이다.
신라에 이런 역경을 이겨내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김춘추이다. 그는 백성들에 의해 쫓겨난 진지왕의 손자였다.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춘추의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로 용춘인데 일운(一云) 용수라고 하여 용춘과 용수를 동일 인물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는 서현의 딸, 즉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삼국유사』「왕력」편에는 용춘을 일작(一作) 용수라하여 『삼국사기』 기록과 같이 용춘과 용수를 동일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에 진평왕 44년(622년)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평왕 51년(629년) 파진찬 용춘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7년 이후에 관등이 2위 이찬에서 4위 파진찬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이다. 신분 변동의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용수와 용춘이 동일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김춘추의 아버지는 용춘의 형인 용수인데 그가 죽자 부인과 아들인 춘추를 동생인 용춘에게 맡겼다고 한다. 용춘과 용수는 동일 인물이 아니고 형제지간이라는 것이다. 또 김춘추의 정궁부인은 보라궁주인데 보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김유신 막내 여동생인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김춘추는 이처럼 왕손의 혈통을 받았지만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로 왕위 계승이 어려운 처지였다. 하지만 그는 역경을 극복하고 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년) 백제의 윤충장군에 의해 대야성(지금의 합천)이 함락 당하고 사위인 품석과 딸을 잃자 그 원한을 갚고자 직접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했으나 연개소문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 후 왜국과 당나라를 오가며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고, 드디어 당태종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약속 받았다.
647년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한 뒤에 김유신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고,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재위 8년 동안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병합을 꾀하던 중 661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태종은 무열왕의 묘호이며 신라에서 묘호를 가진 단 한 분의 왕이다.
그런데 이 묘호가 당나라 태종과 같아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즉 신문왕 12년(692년)에 당나라 중종은 사신을 보내 ‘김춘추의 묘호를 당태종과 같이 한 것은 무례한 일이니 속히 고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신문왕은 ‘선왕인 춘추의 시호가 같은 것은 우연한 일이나 고치도록 하겠다. 그러나 선왕인 춘추도 어질고 생전에 김유신 같은 좋은 신하를 얻어 삼한을 통일하여 공이 아주 크다. 별세하던 날에 신하와 백성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묘호가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며 버티었고, 결국 당나라에서 더 이상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김춘추에 대해서는 당시 신라뿐만 아니고 나라 밖에서도 특출한 인물이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당태종이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여 후하게 대우하였다’ 또 『일본서기』에서도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는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