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천정(天井)
-이성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 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밭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별로 피어 있는 밤하늘의 메밀꽃
이렇게 맑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가, 때묻지 않은 감성을 자극하는 시가 다 있는가? 일상이 답답하고 시들해질 때쯤이면 찾아 드는 이성선 시인의 작품이다. 시골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밭일 하시는 부모를 따라 밭둑에서 장난을 치며 놀았던 추억이 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그보다 사연이 깊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는” 싱그러운 메밀밭. 고랑 사이에서 바람과 장난을 치는 어린 손자 걱정에 메밀을 꺾다 말고 한번씩 이 쪽을 살피시는 할머니. 이 시의 화자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던 모양이다. 부모 없이 키우는 손자. 그러니 더 애틋하고 짠했으리. 할머니는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아주 커서도 덜 자란” 그 손자의 성장을 근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린애에게 밭둑이 위태롭듯이 아주 커서도 덜 자랐다고 생각하는 순수하고 소박한 화자에게 세상은 얼마나 아슬했겠는가.
이윽고 할머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손자를 남겨두고 저승으로 가셨다. 어른이 된 손자는 세파에 시달리면서 할머니와의 긴 추억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 “오늘 저녁” 문득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어릴 적 메밀꽃들이 보이고, 할머니가 보이는 게 아닌가.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메밀밭 사이사이로 아직도 손자를 살피고 계신 것이 아닌가.
메밀꽃밭과 은하수가 펼쳐진 밤의 발상이 우리를 한없이 아련하게 한다. 죽음은 온 우주를 천정으로 보고, 이 지상을 마당으로 보면 초월할 수가 있구나. 삶과 죽음이 다 한 방 안의 일이다. 더구나 그 방의 천정은 하늘우물(天井)이다. 그렇게 스밀 수가 있다. 맑게 흐를 수가 있다.
그랬다. 어릴 적 모깃불이 타들어가는 마당의 멍석에서 자다 깨어 바라본 하늘, 별들 사이를 흐르는 보오얀 빛 은하수는 메밀꽃밭이었다. 지상에 누운 내 가슴 사이로 하늘이 막 스며들었다. 요즘은 어지간한 곳에서는 하늘의 은하수를 볼 수가 없다. 몽골 오지의 평원에서 바라본 밤하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가 그립다. 밤하늘의 별무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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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