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일상생활을 하며 늘 분별심에 사로잡힌다. 좋은 것 나쁜 것, 옳은 일 그른 일,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좋은 음식 나쁜 음식, 좋은 직업 나쁜 직업,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등, 모든 대상이 다 좋고 나쁨으로 나뉘며 모든 것이 다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어진다.
세상 만물은 다 저 생긴 대로 원래 그대로 존재할 뿐인데, 유독 사람이 좋고 나쁨을 나누게 되니 좋고 나쁨이란 사람들이 가지는 분별심의 결과일 뿐, 사물이 본래 그런 물성(物性)을 지닌 바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공기가 없으면 잠시도 생존이 불가한 존재이지만 공기가 심하게 요동치면 태풍이 되고, 태풍은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물(水)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지만 그 역시 때로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불(火)의 존재 역시 긍정과 부정을 공유한다.
남편이 원수 같아도 남편은 있어야 하고 정치가 혐오스러워도 정치 역시 필요하다. 논리가 있어야 하지만 그 논리가 장애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두뇌는 기본적으로 로직회로이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논리적인 사고를 하려 하지만 그 논리가 분별을 만들게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겨우 여기까지가 인간 지성의 한계는 아니며 철저히 분별하여 그 분별심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그 분별심마저 버릴 수 있는 다음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될 터인데 나를 포함한 뭇 대중들이 거기에 이르지 못하니 세상은 늘 시시비비로 시끌벅적해 조용할 날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악처(惡妻) 때문에 철학자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반대로 보면 소크라테스가 악처를 만들었을 개연성이 충분해 보인다.
가진 것도 잘난 것도 없는 위인이 가사(家事)는 전혀 돌보지 않고 허구한 날 길거리에 나아가 철학 강의만 하고 있으니 그 부인인들 오죽 속이 터졌을까. 그가 대중들에겐 존경의 대상이었을지 몰라도 그의 아내에게는 주간사(晝間事)도 야간사(夜間事)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철천지원수 같은 인간이었음이 당연하다.
그는 스스로 말했다. 모두가 다 아는 얘기겠지만 순 우리 경상도 말로 하면, “니 꼬라지를 알아라!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은 안다” 그 말 한 마디라도 남겨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려 들고, 스스로를 분별할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함부로 모든 것을 분별하려 드니, 분별을 떠나기는커녕 그 분별조차 분별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한 게 아닌가?
내가 보기에 사람은 아무도 보수적으로 태어난 적이 없으며, 아무도 진보적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저마다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르고, 달라 보이지만 비슷한 인간으로 태어났을 뿐인데, 누군가가 분별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 같고, 사람들은 어느 편에 서기를 강요당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이 어떤 자질을 가진 사람인가를 분별하기 전에, 보수야? 진보야? 로 구분하려는 새로운 분별 기준이 존재하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적개심이라는 콤플렉스까지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사회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고, 소위 이 색깔 콤플렉스를 해소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사회통합은 영영 어려워지고, 국론이 양분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주위를 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정치인들이야 그것이 그들의 생존전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국민들이 서로 그런 분별기준을 가지는 것은 절대로 경계해야 할 일이라 생각되며,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오로지 그들의 자질과 인격과 능력이 대상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든 분별을 떠나야 제대로 된 분별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특히 우리 지역은 그런 분별이 심해 보이고 그런 지역민들의 분별심이 이 지역을 더욱 고립되게 하며 낙후되게 하는 원인은 아닌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