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대 어르신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새로운 삶의 재미를 전해주는 권귀연(65) 씨. 2010년 즈음 지역 영지초의 교장으로 있을 당시 폐교위험에 놓여있던 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을주민들과 힘을 모았고 다행히 마을의 학교로 계속 유지됐다. 이후 지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시 모았고, 고령의 어르신들이 많은 농촌지역이라 즐길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한 것. “어르신들이 노래교실을 원했어요. 그래서 강사를 초청해 노래교실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어르신들이 노래를 제대로 따라 부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쭸더니, ‘글자를 몰라서 가사를 따라 부르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때 ‘아...내가 해야 할 일이 이거구나’라고 생각하고 어르신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오후 4시 이후에 학교 교실에서 글 공부를 시작했죠” 어르신들을 위해 준비한 가방과 필기구, 초등 1학년 교사들과 힘을 모아 제작한 글자수업 교재까지 어르신들에게 새로운 삶의 즐거움을 전해주기 위해 본격적으로 글자교실을 준비하고 시작했다. 어르신들도 글을 배우고 싶다는 강한 욕구로 무장하고 글자교실에 참여했다. 한 명도 포기하는 사람이 없었고 아이들은 방학을 했어도 학교는 방학도 없이 권귀연 씨의 글자수업이 이어졌다. 어르신들의 체력이 약해 학교를 오가는데 힘이 들어도 매일 수업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어르신들의 ‘열정’과 권귀연 씨의 ‘책임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당시 타 학교로의 전근을 6개월을 남겨두고 있었던 터라 매일을 쉬지 않고 글 공부를 진행했던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도 ‘어설프게 시작해서 어르신들에게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면 어쩌나’라는 마음이 있었죠. 전근이 얼마 안남은 시점에서 어르신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고 글자교실이 흐지부지해지면 ‘어르신들의 실망감을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매일 했습니다. 출장을 다녀와도, 비가와도, 눈이와도, 정말 매일 같이 했습니다.(웃음) 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어르신들이었어요. 한 분도 빠지지 않고 매일 나와서 공부를 하는 모습에 많이 감동했습니다” 수업은 매일같이 계속 됐고 전근가야 할 날이 가까워지면서 권귀연 씨도, 어르신들도 아쉬움이 밀려왔다. 전근을 간다는 이유로 글자교실을 그만둘 수 없었다. 아직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어르신들과 더 가르쳐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두 번이라도 계속 하실 수 있겠어요?’라고 어르신들에게 여쭸었죠. 돌아온 대답이 저에게 확신과 감동을 줬죠. ‘얼마든지요 선생님이 아니면 누가 우리에게 글을 알려주겠어요’, ‘글을 배우고 나서는 인생이 즐거워요’, ‘선생님을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라는 말이었습니다” 전근을 간 이후에도 일주일에 2회 글자교실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이제는 책도 읽고, 은행이나 물건을 구매할 때, 식당에서 음식도 직접 주문할 수 있을 정도로 어르신들의 실력이 많이 향상됐다. “시작은 어르신들의 삶의 질을 바꿔주기 위해서였지만 돌이켜보면 오히려 제 삶의 질이 바뀌었던 것 같네요. 어르신들과의 약속(매일 수업을 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건강을 유지해야 했고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야 하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스스로 계속 발전했던 것 같아요. ‘교사’라는 직업에 본분을 다한 것 같아요” 어르신들과의 약속을 지키며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 중이라는 권귀연 씨.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르신들과의 약속을 계속 지켜나갈 것이라고 했다. “75세가 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할 생각입니다. 이제 한 10년 남았네요.(웃음) 만약 누가 저에게 글자교실을 하라고 등 떠밀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시간은 저절로 생기고 따라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75세까지라고 했지만 건강이 허락하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계속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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