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빈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마저 덜어낸 가난 시인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와 줄기를 뽑을 시기를 놓치고 꽃밭을 만들고 말았다. 뿌리와 줄기란 무엇인가. 입에 들어갈 음식이니 ‘실용’의 대상이다. 이에 비하면 꽃은 아름다움이 본질이니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의 대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는 사람들의 힐난에 가까운 물음은 실용과 무용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흰열무꽃에 내려앉는” “흰 열무꽃잎같은 나비떼”다. 나비떼가 열무꽃에 머무는 시간은 사람에겐 “3초씩 5초씩”의 찰나의 시간이지만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선잠이 들” 정도의 시간이다. 왜 시인은 나비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나란히 서술하고 있을까? 영원의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짧게 느껴지기는 꽃과 열무처럼 나비나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연에 속한 작은 것들이 우리의 몸과 동체(同體)임을 직감한다. “바람을 잠재”울 줄도, 멋스런 풍채로 앉을 줄도 아는 나비떼, 나비떼에게 무릎까지 내어주는 열무꽃들. ‘나’-‘이웃’-‘나비’-‘열무꽃’은 평등하게 존재한다. 기실 우리 생도 “잎이 마르고 줄기가 마르고 뿌리가 사라지는 몸의 숙박부”(「극빈2」)인 것을. 그때 시인에게 한 소식이 온다. 꽃들은 나비에게 하는 것처럼 나는 그동안 누구에게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있었던가? 마침내 시인은 ‘극빈’의 단계로 들어간다. 쓸모 있는 뿌리와 줄기를 놓치고, 쓸모 없는 꽃을 받아 가난해진 시인이, 나비에게 꽃의 주인 자리를 물려주고 빈손이 된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마저 덜어낸 가난이다. 그것은 또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예수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의 그 가난이다. --------------------------------------------------------------------- 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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