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 가라”
독일의 어느 시인이 한 말이다. 이 말에 혹해서 홀로 자주 산을 찾는다. 여느 때와 같이 등산화를 조여 매고 집을 나섰다.
오늘의 행선지는 선도산이다. 영혼이 고독해서가 아니고 선도가 탐이 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선도산의 옛 자취를 더듬고 신화와 전설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선도산 산행에서 운이 좋아 선도를 따 먹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을 해본다. 선도 즉 천도를 먹은 동방삭이 3천갑자를 살았으니 햇수로 18만년이 된다. 너무 오래 사는 게 아닐까 공연한 걱정을 해 본다.
하지만 선도산에 선도는 없었다. 대신 더러 산딸기가 눈에 뜨인다. 산딸기는 줄딸기, 거지딸기, 멍석딸기, 곰딸기, 장딸기, 겨울딸기, 수리딸기, 거제딸기, 섬나무딸기, 복분자딸기, 단풍딸기, 뱀딸기 등 상당히 다양하여 약 20여종에 달한다고 한다. 7월 중순을 지나 빨갛게 익어가는 이 딸기는 그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빨갛게 잘 익었지만 맛은 별로 없고 그저 나무껍질을 씹는 느낌이다.
경주 평지에는 월성, 금성, 경주읍성 등이 있고 산성으로는 이곳 선도산성을 포함하여 명활산성, 남산성, 도당산성, 관문산성, 북형산성, 부산성, 작성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경주읍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 때 축성되었다.
선도산성은 서악동 선도산 산 중턱을 돌로 두른 둘레 약 2.9km의 태뫼식 산성이다. 흔히 산성은 테뫼식과 포곡식(包谷式)으로 분류하고 있다. 테뫼식은 산의 정상부만을 두른 것으로서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여 발권식(鉢圈式)이라고도 하는데 규모가 작다. 포곡식은 산의 정상에서부터 계곡의 아래쪽까지를 감싸고 있는 큰 규모의 산성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15년’조에 “가을 7월, 명활성은 둘레를 3000보로, 서형산성은 2000보로 각각 개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서형산성이 선도산성으로 이 시기에 개축하였다고 하니 실제로 축조된 것은 그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무왕 13년 봄 2월에 선도산성을 다시 증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성과 관련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은 서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들을 방어하여 도성을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현재 이 산성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어 어떤 방식으로 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곳 선도산의 전체적인 지형을 살펴보면 남쪽과 동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굳이 성벽을 높이 쌓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우 가파르다. 따라서 북쪽과 서쪽은 비교적 낮게 쌓았을 것이다.
성 안쪽으로는 구조물의 흔적이 거의 없다. 다만 동쪽 평평한 곳 일부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 일부가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애장왕 10년 여름 6월, 서형산성 소금 창고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성 안쪽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남쪽에 자연석의 돌무지가 있는데 자연석을 쌓아 올린 것으로 높이가 약 1m 정도이다. 이 돌들은 이곳으로 침입해 오는 적을 향해 돌팔매질 할 때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인들은 신라 사람들에게는 골리앗이었다. 그래서 돌팔매로 이들을 제압하고자 신라의 다윗이 이곳 선도산성을 지키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