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김사인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 먹으로 갈까 긴 긴 장마 -마음의 산사에서 누려보는 장마철의 호사 길고 지루하고 눅눅한 장마. 비에 갇혀 빈둥거리며 한껏 부려보는 생각의 호사를 그리고 있는 시다. 몇날 며칠 비는 속절없이 내리고, 마음에 밀려오는 이런저런 생각들.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 줄 모르는 심사가 잘 드러난다. 강원도 홍천, 공작산이 품어 안은 수타사를 떠올려 보지만, 그 절은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없이 “구죽죽” 오시는 비를 보며 시인이 마음 속에 지은 절이 아니겠는가? 서정주가 영산홍을 보고 “산자락에 낮잠든/슬픈 소실댁”(「영산홍」)을 떠올렸 듯 말이다. 빗줄기에 갇힌 수타사에서 가장 보고픈 세목들은 무얼까? 시인은 문득 물미나리와 패랭이꽃이 비맞아 흔들리는 모습을 떠올린다. 요사채 아랫목에 젖은 발 말리고, 종일 먼 산 보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늘어진 물푸레 나무 곁, 눈에 잘 안 띄는 함박꽃이 비 맞는 모습도 담고 싶다. 생명 가진 것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시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이 일들이라고 심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는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싶고, 그것도 심심해지면 ‘거짓말 왕궁’ 속에 작은 며느리를 불러내 민화투를 치거나, 수타사 공양주에게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가는 상상의 호사를 부린다. 물론 시인은 아직 집에서 한 발자국도 걸음을 떼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수천 수백 번 지었다 허물었다를 반복하는 마음의 절들. 장마철에만 가질 수 있는 생각의 사치. 이건 세속사의 반대편에서 누리는 특권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한없이 부려보는 이런 장마라도 왔으면 싶은데, 올 여름은 아직 비다운 비도 내리지 않으니. 네기럴! ---------------------------------------------------------------------- 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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