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문명사의 관점으로 풍류도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정형진 신라얼문화원장이 신라인들이 실천하고 있었던 고유의 도인 풍류도에 대해 심도있는 특강을 준비하고 있다. ‘풍류도의 기원과 흐름 이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예정인 것.
오는 14일(금) 오후 7시 경주문화원에서 마련한 특강을 통해, 신라의 풍류도가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무의식에 살아서 작동하고 있다는 연결고리를 정통한 논리로 풀이해 풍류도에 대한 청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정 원장은 조선 후기 영·정조 때의 양명학자인 이종휘의 『수산집』 신라론에서 ‘노장의 도가 신라에 아직 도입되지 않은 혁거세부터 소지왕대까지 신라인은 노장의 도를 배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능히 자연의 도에 따라서 다스려가고 있었다’고 전하면서 노장의 도, 즉 도교가 아직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신라에는 노장의 도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점을 제기한다. 자연의 도란 바로 신라인들이 실천하고 있던 풍류도라는 것을 알린다.
정 원장은 신라의 진흥왕은 원화제도를 창설했다가 문제가 발생하자 화랑을 중심으로 하는 풍월도를 창설했다면서 『삼국사기』는 진흥왕이 풍월도를 창설한 동기를 “(진흥왕은)천성이 멋스러워 신선을 크게 숭상하였다(天性風味 多尙神仙)(『삼국유사』,‘미륵선화 미시랑과 진자사’조)”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때 진흥왕이 숭상한 신선은 분명 고유의 신선이며 신선은 고유의 풍류도인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정 원장은 과연 신라로 전해진 풍류도는 어떤 정신을 담고 있었던가에 주목한다. 풍류도의 내용은 최치원선생이 지은 「난랑비서」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면서 풍류도가 정확히 어떤 도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한 학자가 아직 없다고 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풍류도를 연구했는데도 ‘이미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사상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는 풍류도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풍류도에 관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풍류도를 수행하고 계승해 왔던 조상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역사정체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정 원장은 동아시아문화사에서 풍류도를 처음 실천한 집단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세력이며 이들이 신선사상의 뿌리를 심은 사람들이라 설명한다. 풍류도의 연원을 찾아 들어가면 그 연원은 신석기시대 후기 중국 중원에서 활동하던 환웅세력인 공공씨와 만난다. 그 실마리는 자장스님이 남겼다면서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서 자장은 신라를 주도하던 김씨 왕족은 인도의 찰리종족(석가족)과 인연이 있으며, 이전 신라를 주도하던 세력은 ‘동이공공’에 닿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동이공공은 『삼국사기』 박혁거세 조에 보이는 진인(辰人)으로 진한(辰韓)을 주도한 세력을 말한다고 풀이한다.
정형진 원장은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RHK,2014)는 책에서 이미 진인을 단군조선의 직계 후손으로 파악한 바 있다. “그러므로 박혁거세는 단군조선의 직계인 셈이며 바로 이들에 의해서 단군조선에서 행해지던 풍류도가 신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신라 정신의 요람인 경주는 우리의 역사 정체성이나 사상 정체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면서 “경주에서 원효나 최치원, 최제우 같은 기라성 같은 풍류도인들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제우가 동학을 일으킨 것을 두고 경주의 또 다른 지성인 범부 김정설이 ‘풍류도의 부활’이라고 했다. 서라벌 땅 경주는 통일시대를 이끌 또 다른 풍류도인을 잉태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풍류도는 단순히 단군시대의 그것이 아니라 그 연원은 중국 중원에서 황제계의 요임금에게 밀려난 공공씨에게 닿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면서, 풍류도를 실천하던 공공씨는 자신들이 하늘에서 온 천손이라고 생각했고, 하늘을 섬기며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던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사실은 공공씨의 명칭을 이해하면 알 수 있다면서 공(共)자의 갑골문을 보면 양손으로 무언가를 받드는 형상으로, 그들은 공(工)을 받드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工)이 상형한 것은 『삼국지』한조에 소도(蘇塗)라고 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설명하는 대목을 지적하며, 이때 소도에 세워진 나무가 공(工)자의 가운데 기둥이라고 한다. 그 소도(=솟대) 아래서 무당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가 바로 무당 무(巫)자가 생겼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불칠처가람이 소도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며 서라벌 땅에 공공의 무교(巫敎)문화가 전달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피력한다.
즉, 동아시아 전체에서 무교를 창시하고 계승했던 사람들이 공공이었고, 그들의 정신기맥은 단군왕검사회를 거쳐 신라의 풍류도로 전승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 정신은 우리들의 무의식에 살아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정형진 원장의 또 다른 특강이 서울에서 마련된다. (사)유라시안 네트워크에서 마련한 유라시안 제30회 역사인문학 특강으로 10일 오후 5시,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한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를 주제로 특강을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