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불교성지 순례 차 인도를 다녀온 적이 있다. 부처님의 거룩하신 발자취를 둘러보는 답사였는데 여행 중 가장 민망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몇 시간을 달리다가 용변을 볼 시간이 되면 버스에서 내려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가라고 한다. 허허벌판 전체가 화장실이었다. 옛 신라 때 꿈에 이곳 선도산 위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본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선머슴이 아닌 아리따운 처녀로 김유신의 누이 보희(寶姬)였다. 그녀가 눈 오줌이 서라벌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에 여동생인 문희(文姬)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문희가 그 꿈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별로 유쾌한 꿈이 아니라서 꺼림직 하던 참이었다. “무엇으로 사려 하느냐?” 그냥 꿈을 넘기고 싶었으나 동생이 관심을 보이자 흥정을 해 본 것이었다.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그렇게 하자.” 보희는 얼른 꿈을 넘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희는 이 꿈이 예사 꿈이 아님을 알았다. 문희가 옷섶을 벌리자 언니인 보희가 꿈을 넘겨주었다. 보희는 바로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그런 지 10일이 지난 어느 날 유신공이 춘추공과 함께 그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서 옷끈을 떨어뜨렸다. “우리 집에 들어가서 옷끈을 꿰매도록 합시다.” 춘추공이 유신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유신이 아해(阿海, 보희의 어릴 때 이름)를 보고 옷을 꿰매 드리라 하였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가벼이 귀공자를 가까이한단 말입니까?” 아해가 사양하자* 유신은 아지(阿之, 문희의 어릴 때 이름)에게 옷을 꿰매도록 했다. 춘추공은 유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드디어 아지와 정을 통하였다. 이후로 자주 서로 만나게 되니 결국 아지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유신이 그 사실을 알고 짐짓 아지를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임신을 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에 소문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여왕이 남산에 놀러가는 것을 기다려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르자 연기가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것을 보고는 무슨 연기냐고 물었다. “아마도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 그때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그 앞에 있다가 왕의 물음에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네가 한 짓이구나.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왕의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 세상에 드러내 놓고 혼례를 올렸다. 김춘추와 문희는 신분상으로 양가의 혼례가 성립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김유신의 지략으로 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 김춘추가 신라 제29대 왕위에 오르자 아지 즉 문희는 문명왕후가 되었다. 무열왕과 문명왕후는 문무왕이 된 법민(法敏)과 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인태(仁泰)·지경(智鏡)·개원(愷元) 등의 아들을 낳았다.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전’에 진덕여왕 5년(651), 인문의 나이 23세에 왕명을 받아 대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김인문은 629년생이고, 혼전 임신으로 태어난 법민이 형이니 그는 629년 이전에 출생한 셈이다. 선덕여왕은 632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남산에 올라 연기를 보고 춘추공에게 문희를 구하라고 한 것은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위작(僞作) 여부로 학계에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18세 풍월주 춘추공’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때 공의 정궁부인(正宮夫人)인 보라궁주(宝羅宮主)는 보종공의 딸이었다. 아름다웠으며 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古陀炤)**를 낳아 매우 사랑했다.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했다. 유신이 이에 장작더미를 마당에 쌓아놓고 막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하고는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때 공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사실을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 하였다. 공은 이에 ……하여 구하였다.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보라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문희를 태워 죽인다고 한 사건은 선덕여왕이 공주일 때이다. 또 문희는 춘추의 보라궁주에 이은 두 번째 부인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부는 보육(寶育)이다. 그가 신라 말엽 송악군 마하갑(摩訶岬)에 살 때 어떤 술사가 와서 여기는 당나라의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될 터라고 하였다. 보육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둘째 딸의 이름이 진의(辰義)였다. 진의가 열다섯 살 때 그 언니가 오관산(五冠山) 정상에서 오줌을 누니 천하가 잠긴 꿈을 꾸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진의가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그 뒤 당나라 숙종(肅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어느 날 산천을 두루 유람하던 중 송악군 보육의 집에 머무르다가 두 딸의 미모에 끌려 헤진 옷을 꿰매달라고 청하였다. 보육은 큰 딸에게 이 일을 시켰다. 그러나 이 딸은 문턱을 넘다가 넘어져 코피가 흐르므로 할 수 없이 둘째 딸에게 시켰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어 작제건(作帝建)을 낳았는데 이가 곧 왕건의 조부이다. *『삼국유사』 주(註)에 의하면 고본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고타소는 선덕왕 11년(642) 백제의 군대가 대량주를 함락할 때 죽은 품석의 부인이다. ***포사는 당시 포석정에 있던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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