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항쟁은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6월 10일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로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으며,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6.29특별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를 국민의 힘으로 이끌어 냈다. 6월 항쟁은 군사적 독재정치의 종식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형식적으로는 노태우 정권의 출범으로 귀결돼 군사주의가 완전히 끝냈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월 항쟁은 시민, 학생,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이 전국적으로 참여한 민주화운동이었다.
하지만 30년 전 경주의 민주화운동은 미미했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6월 항쟁도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동국대 경주캠퍼스 학생들이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하면서 민주화운동의 불모지 경주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총학생회 중심으로 6월 민주항쟁 불붙다
당시 경주지역 민주화운동의 주축은 동국대 경주캠퍼스 총학생회였다. 제4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강진수(법학과 3년)와 장지태(국문학과 4년/민민투위원장), 방일성(경제학과 3년/부총학생회장) 등이 이끌었다.
강진수 씨는 “6월 10일 오전 10시경 비상총회 명분으로 녹야원에서 삭발식을 한다고 알렸는데 학우들이 구름같이 몰렸다. 당시 내가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교문으로 진출했지만 이미 경찰이 가로막고 있었고 곧 바로 최루탄을 계속 쏘는 바람에 흩어졌다가, 내가 끝까지 버티자 그때서야 학생들이 다시 뭉치면서 시위가 불이 붙었다”면서 “다리(경대교)가 가로 막고 있어 시내로 진출하지 못하자 강을 건너는 학우들도 있었다. 그렇게 나간 학우들이 파출소를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또 “경주도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6.10민주항쟁에 큰 역할을 했다. 어르신들이 경찰들에게 ‘학생들을 왜 잡아가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회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은 강 씨를 수배했으며 강 씨는 교직원의 승용차 트렁크에 숨어서 학교를 빠져 나왔다고 한다.
제5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김동선 씨는 “6월 10일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학우들이 녹야원으로 모여 들었다. 당시 학우들의 참여는 지금의 촛불집회와 같았다고 생각하며 바로 국민의 힘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30년 전을 회상하며 의미를 되새기다
지난 10일 오전 11시 동국대 경주캠퍼스 녹야원에서 ‘경주시민과 함께하는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이 동국대 제3~6대 총학생회 주최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30년 전 경주캠퍼스에서 민주항쟁을 주도했던 이들과 졸업생, 학교관계자, 가족, 전라향우회 회원들, 현 총학생회 임원, 당시 학원담당을 했던 경찰관계자 등이 한자리에 모여 30년 전을 되돌아보며 당시를 회고했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국대 경주캠퍼스 학원담당 경찰이었던 장모 씨는 “당시 동국대 경주캠퍼스를 담당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교문을 나오면 다리(경대교)가 있어 경찰이 다리만 막고 있으면 시내 쪽으로 가지 못했다. 당시 4000여명의 학생들 모였는데 (정보보고 당시)400명이 모였다고 보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시위였다”면서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나라가 안정되고 후손들이 잘살기를 바랄뿐이다”고 말했다.
당시 교직원이었던 박모 씨는 “당시 경찰서에서 학교 내 상황을 알기 위해 연락이 자주와 곤란했다. 경찰이 쏜 최루탄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회고 했다.
강진수 씨는 “긴 시간 동안 많은 희생이 있었고 국민들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많은 이들이 경주에 그런 시위가 있었냐고 한다. 돌이켜보면 당시 동국대 경주캠퍼스 학우들이 벌인 6.10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어디에서 한 것 보다 뜻깊었다”고 말했다. 강 씨는 또 “내년에는 행사를 더 준비해 30년 전 경주에서 있었던 6.10민주항쟁을 되새기고 시민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