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전의 뒤편 요사채 앞쪽 정원에 부조로 된 석조불상이 있다. 오랜 세월 야외에 노출되어 훼손이 심하고 대퇴부 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그 아래 대좌 등은 형태를 알 수가 없다.
주변에는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으며 절을 찾는 사람들의 동선이 미치지 않은 곳이라 방치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불상은 일반 입불상과는 매우 다른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소중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광배와 함께 조각되어 있는 부조상으로서 당당한 어깨와 가슴, 굴곡진 허리와 대퇴부 등 신체의 양감이 충실하게 표현되었으며 흘러내리는 옷주름 또한 자연스럽다. 머리의 앞부분이 떨어져나가 상호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얼굴의 윤곽선이 풍만하고 둥글며 머리 위 육계의 표현이 뚜렷하고 두툼한 양쪽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풍화가 심하여 나발의 표현은 구별이 되지 않으며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인다.
수인은 두 손을 모두 안으로 구부려 배 부근에 두고 있는데 오른손은 손등이 파손되고 손가락 끝부분만 남아 있으며, 왼손 역시 파손이 심하나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서 무엇인가 둥근 물체를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약합을 든 약사불로 추정된다.
광배는 신광과 두광이 한 돌에 새겨져 있으며 두광은 이중의 선으로 나타내었고 신광은 높이를 달리한 면으로 처리하였다. 두광과 신광의 둘레는 풍화가 심하여 구분이 어려우나 화염문의 흔적이 보인다.
대의(大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 형식이다. 왼쪽 어깨를 덮고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내려온 옷단이 허리에서 몸 뒤로 돌아가며 굵은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내의인 승기지 역시 가슴을 감싸고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으며 하체의 옷주름은 양쪽 대퇴부에서 각각 U자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며 대퇴부 사이에는 짧은 호형주름이 2-3줄씩 새겨져 있다.
특히 이 불상은 입불상이면서도 편단우견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편단우견 형식의 대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것은 석굴암 본존불이 완성되는 시기인 8세기 중엽 이후인데 대체로 입상이 아닌 좌상형식이다.
이 석불처럼 입상이면서 편단우견을 하고 있는 예는 삼국시대 주로 신라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남아있는 예가 드물다. 따라서 편견우단에 입불상인 이 분황사 불상은 매우 드문 형식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조상 시기는 8세기 중반 또는 후반기 정도로 추정된다.
1960년 늦가을 고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 고문이 ‘대지’의 작가 펄 벅(Pearl Buck)과 지방을 여행할 때였다. 달구지를 묵묵히 끄는 소와 지게에 볏단을 가득 짊어진 농부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본 펄 벅이 흥분해서 말했다.
“농부가 볏단을 지다니! 미국 같으면 달구지에 지게와 볏단을 싣는 것은 물론 농부도 올라탔을 거야.”
소의 짐을 덜어 주려는 농부의 마음에 매료된 펄 벅은 훗날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이 장면을 꼽았다.
절 마당 귀퉁이에 방치되어 있는 소박한 모습의 이 불상이 분황사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보인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석조여래상 앞에는 일본식 석등이 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대원심보살 사리탑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대원심보살[月城崔氏順伊]께서는 불기 2404년(1860)에 태어나시어 불기 2479(1935)에 열반하였다. 어려서부터 불도에 지극 정성으로 정진하셨는데 불기 2477년(1933) 살아계실 때 치아에서 백옥(부처님 모양)의 사리가 나와 온 세상이 경탄하여 그 불도 정성을 기리고자 이 사리탑에 봉안, 분황사에 모셨다.”
고승이 아닌 일반 신도의 사리탑은 그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일본식 석등형식인데 사리탑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석등은 일본의 나라나 교토의 사찰 또는 일제강점기 일본 불교인 조동종의 경주 포교소였던 서부동에 있는 구 서경사에서도 볼 수 있다.